1. 학봉 김성일 종택
학봉 김성일 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일(一)자형으로 안채와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집은 학봉이 살았던 곳으로 원래 이자리에 있던것을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온다하여 1762년 100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가
1964년 다시 이자리로 옮겼으며,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김성일(金誠一 1538년~159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시호는 문충공이며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김성일은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 등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귀국 후 황윤길은 일본이 침공해올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황윤길 외에 다른 수행원들도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믿는 우를 범했다.
황윤길 등의 보고대로 1592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처벌을 명했으나
김성일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유성룡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김성일은 초유사에 임명되어 함양, 죽산 등지에서 격문을 띄웠으며 곽재우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지역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어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내 각지를 순행하며 독전하다가 이듬해 진주공관에서 순직했다.
"학봉선생구택"이라는 편액이 있는 대문
대문을 들어서면 정원과 본채가 보인다
사랑채
사랑채앞 거북모양의 바위
풍뢰헌
운장각 - 유물을 보관하는 건물인데 지금은 대부분 기념관으로 이전하였다함
사랑채 측면
학봉기념관
2.의성김씨 종택
의성김씨 종택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종가로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물 제45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김성일(1538∼1593)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집의 평면배치와 구성은 一자형 사랑채와 ㅁ자형의 안채를 행랑채와 연결시킨 특이한 평면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ㅁ자형태의 안채건물은 하나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든 생활공간이 연결되어 우리나라 전통가옥 구조와는 다른데
이는 김성일이 명나라에 다녀와 설계하였다는 점등으로 보아 당시 명나라의 주거형태를 많이 참고하였을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이어주는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서재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행랑채 대청의 ㅁ자형 마루는 엄청 넓어 대충보아도 50-100여명이 회의나 제사공간등으로 사용할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와 같은 2층 구조나 대청공간등은 다른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청계 김진(金璡)은 151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우하다가 귀향하여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김진은 김극일, 김수일, 김명일, 김성일, 김복일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자식들이 모두 대과 및 소과에 급제하였기에
세칭 이 집을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일컬었다 한다.
따라서 김진은 조정인(朝廷人)들로부터 숭앙받은 인물이 아니라 가내(家內)의 출충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동인(東人)의 기수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아버지로서 더욱 유명하다.
중택 전면
-대문 오른쪽이 안채이고, 왼쪽이 행랑채로 훗날 안채와 이어서 지은 건물이다-
측면
전체 전경
안채와 행랑채의 중간 쪽문(건물 뒷편)
뒷 건물 중간이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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