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는 1552년(명종 7)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셋째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그 인연으로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했다.
1585년(선조 18)에는 34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응시해 뽑히기도 했으나
얼마 후 글의 내용이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 곽재우는 그때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있었는데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를 점령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官軍)이 일본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일본군의 점령지가 점점 확대되자
부산에서 멀지 않은 의령에 살던 곽재우는 의병을 제일 처음 일으켰다.
그리고 진주 의령등 곳곳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그 후 광해군때는 경상우도조방장을 잠시 맡기도 했으나
낙향한 곽재우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도인처럼 살다가
1617년(광해 9)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훗날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현풍곽씨12정려각은 건물은 정면 12칸, 측면 2칸의 주심포집으로 팔작지붕이며
이 안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三綱五倫(삼강오륜)을 지킨 충신과 열녀, 효자에게 나라에서 포상 하였으며,
그들이 사는 마을 입구에는 정려각(旌閭閣)을 세워주었는데
이곳은 현풍 곽씨 한 집안에서 三綱(삼강)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재위 1567∼1608)까지 포상된 12명을 한 곳에 모시고 있다.
一門三綱(일문삼강 이란 : 한집안에서 삼강(忠ㆍ孝ㆍ烈)을 모두 실천한 가문을 말하는 것이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의 것이나 일문삼강을 비롯한 십이정려각은
전국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 중의 하나로써 중요한 민족사적인 유산이 되고 있다.
현풍곽씨12정려각
1각의 현판
전경
망우당 곽재우 묘소
묘제 후 음복장면(2016.11.10, 음력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