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창녕조씨 본관지명과 역대 주요인물
창녕조씨의 본관인 창녕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인데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라 칭하고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는 화왕군(火王郡) 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때 창녕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 밀양)에
귀속되었다가 인조에 현(縣)으로 복귀,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靈山郡)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화왕산과 창녕
창녕 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제 26대, 재위기간 579-632년)의
사위로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창녕 화왕산 청녕조씨 득성지지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訣)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화왕산 용지(龍池)
왜인(倭人)이 자주 내주(萊州)를 침범하므로 왕이 공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이에 공이 단기(單騎)로 진(陣)에 나아가
말고삐를 당기며 서서히 타이르니 왜인들이 나열하여 절을 하며,
“공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다.” 하고, 곧 군사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고 전한다
조계룡은 그 뒤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의 묘
창녕 조씨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거치면서 현관(顯官)과 명신(名臣)이 많았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절신(節臣)과 학자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신라 말기의 아간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은 신라가 망하자
경주(慶州)의 토함산(吐涵山)에 운둔(隱遯)하여 한 편(篇)의 시(詩)를 쓰기를,
“천년을 누려온 왕업 하루 아침에 망하니, (千年王業一朝塵)
늙고 외로운 신하의 눈물 수건을 적시네. (白首孤臣淚滿巾)
시험 삼아 묻노니 수양산 어디던가? (借問首陽何處是)
토함산 밝은 달을 친하면서 지내리 (吐涵山月自相親)”
하면서 신라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시조 묘제
그의 아들 조겸(曺謙)은 고려 태조(太祖)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에게
장가들었고 벼슬은 태악서승(太樂署丞)을 지냈다.
조겸의 아들 조서(曺瑞)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냈다.
그리고 조서의 아들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代)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 뒤 6대로 소감(少監)을 배출하여 동방의 저성(著姓)으로 알려졌다.
경주 안강 종덕재
조자기(曺自奇)와 조용기(曺用奇) 형제(兄弟)는
고려 현종(顯宗) 때에 거란(契丹)의 침입을 여러 차례 토벌한 공로가 있다.
조저(曺著)는 고려 고종(高宗) 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수성수의충량보국공신(輸誠守義忠亮輔國功臣)
벽상삼중대신(壁上三中大臣) 문하시중(門下侍中)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에 이르렀고
연주부원군(聯珠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장양(莊襄)이다.
창녕 일원각
조광한(曺匡漢)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하고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창성군(昌城君)에 봉(封)해졌다.
조익청(曺益淸)은 충숙왕(忠肅王)때 부터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사직(社稷)을 보필한 공으로 좌정승(左政丞)에 오르고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공민왕 묘정(恭愍王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조계방(曺繼芳)은 공민왕 때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고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충성을 다해 호종(扈從)한 공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조선 태조(朝鮮 太祖)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창녕(昌寧)에 은둔하여 두 편의 시를 쓰기를,
“성긴 울타리 한편 뿐인 이곳은 내 집,
봄이 오면 온 산의 꽃 구경 할 수 있다오,
꾸민 담장과 기둥 어찌 오래 갈수 있으랴,
편안히 앉아 뜰에 가득히 비치는 달빛을 아끼리
[一面疎籬是我家 春來不隔四山花 粉牆丹柱何能久 坐愛庭中月色多]”
또, 세상의 인심 부자를 따르고 가난한 사람을 따르지 않는데,
누가 초야에 묻힌 냉정하고 야윈 늙은이를 기억하랴?
천지의 이치만은 너무나 공평하니,
고요한 초가에도 새봄을 맞으리
[世間從富不從貧 誰記江村冷瘦人 惟有乾坤無厚薄 寂寥茅屋亦靑春] “
하면서, 자신의 회포를 읊었다.
조민수(曺敏修)징군 묘, 재실, 어록비, 묘비
조민수(曺敏修)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격퇴한 명장(名將)으로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公臣)에 녹훈되고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와 나란히 요동(遼東) 정벌에 나셨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으로 귀양 가서 죽은 절의(節義)의 장군이다.
조비형(曺備衡)은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무과(武科)에 올라 함길(咸吉) ·
평안(平安) · 경상(慶尙) 3도(道)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안무(安武)이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종(世宗) ·문종(文宗) · 단종(端宗) 때
성삼문(成三問) · 박평년(朴彭年)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고
벼슬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이르렀다.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영천(永川)으로 물러나
노산조부제학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墓碑)를 미리 써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끓고 절의를 지켰다.
자(字)는 자경(子景), 호(號)는 단고(丹皐) · 정재(靜齋).
정조(正祖) 때 충정(忠貞)이란 시호(諡號)가 내렸다.
영의정 조석문(曺錫文) 의 묘(파주 장단 민통선 통제구역 내)
조석문(曺錫文,1413~1477)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때
이 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자는 순보(順甫). 성종(成宗) 7년(1476)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조위(曺偉) 선생 구거(율수재),묘소,어록비,초상화
조위(曺偉,1454~1503)는 성종조(成宗朝)의 대 문장가(大文章家)이다.
자형(姉兄)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점필재가 "태허(太虛)야 말로 나의 스승이다." 할 정도로 학문이 대성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홍문관(弘文館)의 관료들과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완성하고 그 서문(序文)을 섰다.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저서로는 매계집(梅溪集)이 있고,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조숙기(曺淑沂,1434~1509)는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전략가(戰略家)로 건주(建州) 정벌(征伐)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자는 문위(文偉)이다.
청백리 정우당 조치우(靑白吏 淨友堂 曺致虞)의 묘
조치우(曺致虞,1459~1529)는 대구부사(大丘府使)와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소학(小學) 1부(部)를 하사받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옥비(玉碑) 두 좌(坐)를 하사받았다.
자는 순경(舜卿), 호는 정우당(淨友堂)이다.
조계은(曺繼殷) · 조계상(曺繼商,1466~1543) 형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조계은은 정국공신(靖國功臣)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조계상은 정국공신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세우(曺世虞,1483~?)는 성균 생원(成均生員)이었을 적에
당시 권신(權臣)인 김안로(金安老) · 허항(許沆) · 채무택(蔡無擇) 등
정유삼흉(丁酉三兇)이 권력을 전횡하며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사안을 감지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과 뜻을 모아 조목조목 거듭 상소(上疏)하여
마침내 그 일당이 복주(伏誅)되게 하였다. 자는 백원(伯元), 호는 석당(石塘)이다.
그의 재종손(再從孫)인 응남(應南).진남(鎭南) 형제(兄弟)와
종손(從孫)인 열(悅)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창녕(昌寧)
대산진(臺山陣)에서 적(敵)을 크게 무찌른 뒤 형제가 순절,
그 충공(忠功)으로 정려(旌閭)되고 열(悅 )은 훈정(訓正)으로 제수(除授)되었다.
조광원(曺光遠,1492~1573)은 문무(文武)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명종(明宗) 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 때에는
경상도 도순찰사(慶尙道都巡察使)로 활약하였으며,
벼슬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어록비,영정,덕천서원,남명문화재
조식(曺植,1501~1572)은 명종(明宗) · 선조조(宣祖朝)의 대학자(大學者)로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은거(隱居)하며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이 퇴계(李退溪)와 더불어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룬 학계(學界)의 거성(巨星)이다.
특히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實行)을 주창하고 경의(敬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에 곽재우(郭再祐)를 위시하여
그의 많은 제자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광해군(光海君) 때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남명집(南冥集), 남명학기(南冥學記),
유편(類編),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다.
조광익(曺光益,1537~1578)은 선조(先祖) 때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장원(壯元)하였으며,
벼슬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자는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 저서로는 취원당집(聚遠堂集)이 있다.
지산 조호익(曺好益)선생 고택,신도비와 망회정,도잠서원,관서부자 석비
조호익(曺好益,1545~1609)은 무함(誣陷)으로 강동에 유배되었고,
배소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후배를 양성하여 관서 지방의 학풍을 진작 시켰으며,
임진왜란 때는 그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벼슬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가례고증(家禮考證),
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등이 있다.
관서부자(關西夫子)는 선조임금이 크게 써서 하사하시고 장려한 글씨이다.
조탁(曺倬,1552~1621)은 별시갑과에 장원(壯元)하고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만여언(萬餘言)에 달하는
부흥책(復興策) 10조(條)를 올려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다.
벼슬은 경기 관찰사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 저서로는 이양당집(二養堂集)이 있다.
조몽정(曺夢楨)의 아들 조탁(曺倬)과 손자 조명욱(曺明勖)은
삼대(三代)에 걸처 영상(領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우인(曺友仁,1561~1625)은 시 · 그림 · 글씨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글씨는 특히 진체(眞體)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 이재(頤齋).
저서로는 이재집(頤齋集), 이재영언(頤齋詠言) 등이 있다.
조한영(曺漢英,1608~1670)은 인조(仁祖)15년(16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였다.
척화파(斥和派)로서 김상헌(金尙憲) · 채이항(蔡以恒)과 청(淸)나라에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투옥(投獄)되었다가 의주(義州)로 이감(移監)되어 석방되었다.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으며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
시호(詩號)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회곡집(晦谷集)이 있다.
조석중(曺錫中,1763~1816)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성자(姓字)를
종전(從前)에 2획(劃)인 조자(曹字)로 써오던 것을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하명(下命)에 따라 1획인 조자(曺字)로 환원(還元)하여
사용할 것을 팔도(八道)의 제종(諸宗)에게 통문(通文)을 보냈다.
그리고 창녕 조씨 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을 편찬하였다.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안강 종덕재와 시조묘단비명
조봉진(曺鳳振,1777~1738)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창녕조씨 시조재각(始祖齋閣)인 종덕재(種德齋)의 기문(記文)을 지었고
시조묘단비명(始祖墓壇碑銘)의 글씨를 썼다.
벼슬은 공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석여(曺錫輿,1813~?)는 1848년(헌종 14)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경상도암행어사를 거쳐 1866년(고종 3)에 황해도관찰사,
1883년에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창녕 조씨 경진대보(昌寧曺氏庚辰大譜)의 서문을 지었다.
(위) 화왕산 창녕조씨 득성지지와 용지
(아래) 창녕 고암면 일원각과 김천 조시영 묘
조시영(曺始永,1843~1912)은 창녕 화왕산 정상에 창녕조씨 득성지지 표석과
창녕 고암면에 창녕조씨 시조영적비와 영적비각인 일원각을 세웠으며,
벼슬은 개항기 동부승지, 경상도소모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봉계(鳳溪) 옥호동(玉壺洞)에 퇴거하여 후진배양에 힘썼으며,
편서로는 "상례제요(喪禮提要)", 저서로는 "후계문집(後溪文集)"이 있다.
조긍섭(曺兢燮,1873~1933)은 달성군(達城郡) 소재 비슬산(琵瑟山)
속에서 운거하여 강학(講學)한 도학자(道學者)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당시 유림(儒林)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끝없는 학구열(學究熱)로 외래사상(外來思想)까지
연구하여 이를 비판할 수 있었으며, 전통유학자의 한 분이다.
독립운동가 조성환과 여주 보통리 생가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한말(韓末)에 참위(參尉)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907년 4월 이동녕(李東寧), 이상설(李相卨), 김구(金九),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대한군정서 군사부장,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군무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및 통수부 막료,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통수부 주임 등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어록비와 국립현충원의 묘
조만식(曺晩植,1883~1950)은 인도(印度)의 간디가 주창(主唱)한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와 민족주의(民族主義) 그리고 안창호(安昌浩)의
국내 투쟁 이름에 크게 감동하여 자기 사상(自己思想)의 거울로 삼았으며,
일제치하에서도 국내에 머물면서 민족산업증진(民族産業增進)과
생활조건개선(生活條件改善), 배일독립정신함양(排日獨立精神函養)을
지표로 한 민족주의운동(民族主義運動)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북한이 공산화된 뒤에도 동포(同胞)를 남겨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북한에 남았던 민족사(民族史)에 남을 인물이다.
1991년 11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유해는 부인 전선애가 남편에게 건네받은 머리카락으로 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어록비와 묘
조봉암(曺奉岩)은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으며, 호는죽산(竹山)이다.
그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였다.
근현대 저명 인물(가나다 순)
조경규(曺京圭) 환경부장관, 조경식(曺京植) 환경부장관, 농림수산부장관,
조국(曺國) 법무부장관,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현(曺國鉉) 제헌 국회의원,
조규갑(曺圭甲) 제헌 국회의원, 조규완(曺圭琬) 5대 국회의원,
조기상(曺淇相) 정무1장관, 11대,12대 국회의원,
조대환(曺大煥) 청와대 민정수석, 조덕현(曺德鉉) 11대 국회의원,
조명환(曺明煥) 5대 국회의원, 조명희(曺明姬) 21대 국회의원,
조상호(曺相鎬) 체육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조영규(曺泳珪) 제헌 및 3,4,5대 국회의원, 조오섭(曺五燮) 21대 국회의원,
조일현(曺馹鉉) 14,17대 국회의원, 조일환(曺逸煥) 4,5,7,8대 국회의원,
조정환(曺正煥) 외무부장관, 조재천(曺在千) 법무부, 내무부장관, 6대 국회의원,
조창대(曺昌大) 7대 국회의원, 조해녕(曺海寧) 대구직할시장(관선),
대구광역시장(관선), 총무처장관, 내무부장관, 대구광역시장(민선),
조해진(曺海珍) 18,19,21대 국회의원, 조형부(曺亨富) 11대 국회의원.
조훈현(曺薰鉉) 20대 국회의원, 세계 바둑계 최초 전관왕, 그랜드슬램,
대법원 청사와 조희대 대법원장
조희대(曺喜大) 제23회 사법고시 합격,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교수,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구지방법원장(대구가정법원장 겸임),
대법관,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저서는 환경법 판례교재, 민사집행법교재 전면 수정 보완 등이 있다.
2023년 12월 8일 대법원장 취임(취임식은 12월 11일)
저명 연예인
나화랑(본명 조광환,曺曠煥) 한국가요 1세대 작곡가,
고려성(본명 조경환,曺景煥) 한국가요 1세대 작사가,
조미미(曺美美) 가수, 태진아(본명 조방헌,曺芳憲) 가수, 조성모(曺誠模) 가수,
조수미(曺秀美) 성악가, 송가인(본명 조은심,曺銀心) 가수,
(2023.12. 8 최종 수정)
2.창녕조씨(昌寧曺氏)의 세거지(世居地)
강원도의 강릉(江陵) · 원주(原州) · 춘천(春川) ·횡성(橫城) 일원과,
경기도 광주(廣州) · 수원(水原) · 서울[京] · 여주(驪州) · 파주 · 화성(華城) 등지와.
경상남도의 거제(巨濟) · 고성(固城) · 김해(金海) · 마산(馬山) · 밀양(密陽) ·
사천(泗川) · 산청(山淸) · 울산(蔚山) ·의령(宜寧) · 진주(晉州) · 진해(鎭海) ·
창녕(昌寧)· 창원(昌原) · 함안(咸安) · 함양(咸陽) · 합천(陜川) 등지와,
경상북도의 경산(慶山) · 경주(慶州) · 고령(高靈) · 금릉(金陵) · 상주((尙州) · 성주(星州) ·
신녕(新寧) ·영천(永川) · 청도(淸道) · 칠곡(漆谷) · 평해(平海) · 하양(河陽) 등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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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忠州) 등지와, 제주도(濟州道)의 제주(濟州)를 들 수 있다.
3.참고 사항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인 조계룡(曺繼龍)이며,
중시조(中始祖)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사위인 조겸(曺謙)이시다.
이후 혼돈의 시기를 거쳐 갱기(更起)로 다시 정리하여, 조겸의 16세(世)인
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 삼형제를 1세로 하고있디.
이 중 송무(松茂), 송학(松鶴)의 후손들이 약 97% 정도로 대부분이며,
그 외는 송군(松君)의 후손들인데, 송군의 7세손인 조흥(曺興)은
고려말 중훈대부(中訓大夫) 태복시경을 역임하였으며,
송군 후손을 대표하는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의 파조이다.
조흥(曺興)은 계림(桂林),상림(上林),중림(中林)의 삼형제를 두었으며,
특히 둘째 아들인 상림(上林)의 후손들 중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1470~1518), 조언홍(曺彦弘),
좌승지 조몽길(曺夢吉,합천), 이조판서인 조몽신(曺夢臣,1532~1593),
문인인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 등이 있으며,
근현대 인물로는 4,5,7,8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일환(曺逸煥)과
조국(曺國,송군 26세) 전 법무부장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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