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5대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가장 오랜기간동안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돈화문 안의 회화(회)나무 8그루(천연기념물 제472호)
돈화문 안
금천교(보물제1762호)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진선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전(국보 225호)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 뜰에서 내려다 보는 조정(마당)으로
정1품에서 정9품, 종1품에서 종9품까지의 만조백관들이 도열해 조회를 하던 곳이다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용상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인정전 측면 전경
선정문
선정전(보물 제814호)
이곳은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으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회랑
선정전 내부
희정당(熙政堂 보물815호)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으로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선평문(宣平門)
대조전(大造殿 보물816호)
대조전은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으로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대조전 내부
흥복헌(興福軒)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
창덕궁의 조형
창덕궁 우물과 경훙각(景薫閣)
창덕궁의 아궁이(군불 넣는 곳)
굴뚝
승화루(承華樓)와 삼삼와
승화루는 조선시대 세자를 위한 공간인 중희당(重熙堂)의 부속 건물로서
바로 옆에 위치한 육각형 정자인 삼삼와(三三窩)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금호문 앞의 회나무
금호문(金虎門)
평소 신하들이 드나들었던 창덕궁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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