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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25)청허정에서

by 안천 조각환 2019. 12. 9.


청허정(淸虛亭)은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내에 있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의 동헌 옆 언덕에 있는 정자이다.

이 시는 조위선생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시 관내를 순행(1494~1495)하는 도중  

호서좌영에 들렀을 때 당시의 풍광과 감회를 시로 읊어 이절도사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또 한수는 천안을 지날적에, 이 절도사가 한양으로 전임해가게 되자

애틋한 마음과 임금곁으로 가는 부러움을 동시에 나타낸 시로 보인다


청허정


청허정에서 차운하여 이 절도사에게 증정하다

(淸虛亭次韻呈李節度)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조란근대백운전(雕欄近對白雲顚) 아름답게 꾸민 난간 구름위로 뻗어있고

자갑창염옹후전(紫甲蒼髥擁後前) 붉은 갑옷입고 회색수염을 쓰다듬는다.

원수연연요격해(遠峀娟娟遙隔海) 아득히 바다너머 산들은 아름답게 보이고

평원막막담생연(平原漠漠淡生烟) 아스라이 들판에선 안개가 피어오른다.


해미읍성 진남문(鎭南門)쪽


읍성 진남문


읍성 문루에 새긴 황명 홍치 4년 신해 조(皇明弘治4年辛亥造)

-명나라 홍치4년(1491년)에 지었다는 석각-


해미읍성 감옥

-이 감옥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8천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앞의 큰 나무에 목을 메어 처형한 현장으로 지금은 천주교의 성지로 되어있는 곳임-


호서좌영((湖西左營) 출입문


동헌 입구


동헌  

-청허정(淸虛亭)은 동헌 오른쪽 언덕위에 있다-


주변가공병삼만(籌邊可控兵三萬) 변방의 군략을 세워 삼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무경료변주십천(撫景聊拚酒十千) 절경에 도취되어 술잔을 만병이나 비웠다.

완대경구무일사(緩帶輕裘無一事) 일없어 갑옷 벗고 허리띠를 푸니

향응화극일여년(香凝畵戟日如年) 향기가 창끝에 엉 키어 하루가 일 년 같다.



동헌 내부


서산 객사



천안에서 삼가 이 절도사(자방)와 헤어지며

-天安奉別李節度(子芳)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정원장동거능반(征轅將動詎能攀) 수레 몰고 가는데 어찌 오를 수 있겠는가?

의분유래백중간(義分由來伯仲間) 그대와는 원래부터 친분은 형제 같았지.

역현미망연한수(亦縣微茫連漢水) 경기도 땅은 까마득히 한강에 이어져 있고

청유초체격야산(靑油迢遆隔倻山) 흰 구름은 아득히 가야산 너머에서 피어오른다.

환주소작금조별(歡州小酌今朝別) 성환에서 한잔 마시고 오늘아침 헤어지려니

현수경구구일한(峴首輕裘舊日閑) 고갯마루에서 평복차림으로 옛날처럼 한가롭다.

취산무빙혼사몽(聚散無憑渾似夢) 만나고 헤어짐이 혼연히 꿈인 듯 허망한데

이군선아철조반(羡君先我綴朝班) 그대가 부럽네, 나보다 먼저 조정에 들어갔으니.




청허정상기추반(淸虛亭上幾追攀) 청허정위를 몇 번이나 따라 올랐던가?

간담상마막역간(肝膽相磨莫逆間) 간담상조하는 막역한 우리사이

횡삭원문동파주(橫槊轅門同把酒) 군문에 창을 누이고 함께 술을 마셨고

연안해서공간산(聯岸海澨共看山) 해안가로 말을 나란히 몰면서 산 경치를 구경했지

인련숙자인은중(人憐叔子仁恩重) 사람들은 포숙의 은혜가 중함을 어여삐 여기나

아애왕공기상한(我愛王公氣象閑) 나는 그대의 기상이 한가함을 사랑한다오.

금일분휴공창망(今日分携空悵望) 오늘 헤어짐에 부질없이 슬퍼지고

신수일야빈첨반(新愁一夜鬂添班) 한밤 내내 새로운 근심에 귀밑머리가 더 희어지리.

 

*가야산 : 서산시 해미읍과 예산군에 걸쳐있는 산

*성환(成歡) : 천안시 성환읍 일원



이 시에 나오는 이 절도사는 전라도 절도사, 자헌대부,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숙기(李淑琦,1429~1489),자는 공근이고 시호는 정양이다.

나이는 선생보다 20여년 많으나 고향이 김천 지례로 동향사람이고

구성면 도동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구성면에 정양공사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분일 것으로 보임


매계집에는 제목에 자방(子芳)이라 되어 있고 절도사는 역임했으나

자방은 이괴(李襘)의 자로서 이괴는 인조 때의 사람으로

1631년에 급제하였는데, 조위선생보다는 150년 정도 이 후 사람인바

후에 매계집 작성 시 잘못 파악하여 기제된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