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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경상감영

by 안천 조각환 2020. 1. 17.


조선은 1392년 개국한 이후 행정체재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과거 고려가 운영하던 5도 양계의

지방행정체계를 8도 체제로 일원화하고 각 도마다 관찰사(觀察使)를 파견하였다.

관찰사는 감사(監使)라고도 불리며, 해당 관할지의 행정 및 사법권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도 겸직함으로써 해당 지역의 군사 지휘권까지 가졌고,

도내의 모든 수령(목민관)과 진관(鎭官)의 장수들은 관찰사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경상감영(慶尙監營)은 조선의 8도제하에서 경상도를(慶尙道)를 관할하던  감영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경주에(慶州)에 위치해 있다가 상주(尙州),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지를 옮겨다니다, 선조 34년(1601년), 최종적으로 대구로 이전되어 정착하였다.

이후 고종(高宗) 33년(1896년) 갑오개혁으로 13도제로 개편한 뒤에도 경상북도의 중심지였다.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하였으며 1966년 경북도청을 산격동으로,이전할때까지 존속하였다.

2017년 4월 26일 "대한민국 사적 제538호 대구 경상감영지"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경상감영공원으로 관리운영되고 있다..


 관풍루(觀風樓)

이 관풍루(觀風樓)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宣和堂)의 남서쪽에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만들어 관풍루라고 불렀다.

원래 명칭은 폐문루(閉文樓)로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것을 알리면서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의 관풍루란 이름은 ‘감사가 누상(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觀風世俗)’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달성공원 북쪽에 옮겨 세워져 있는데 1906년 당시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건물만 옮긴 것으로 1970년 건물 노후로 해체되었으나

1973년 다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언젠가 경상감영 복원시에 원래자리로 돌아가 제자리에 있어야 할 건물이다.


선화당(宣化堂)

선화당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정당(正堂)으로 조선 선조 34년(1601)에 지어졌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년) 3차례에 걸쳐 화재로 타버린것을

순조7년(1807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화당이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들에게 어진 정책을 베풀어

교화하는(宣上德而化下民) 건물’임을 뜻한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경상감영에는 선화당(宣化堂)을 비롯하여 징청각과

내아(內衙)인 응향당(凝香堂)·제승당(制勝堂), 중군(中軍)이 집무하던 응수당(應酬堂),

별무사(別武士)의 잔재소(殘才所)이던 관덕당(觀德堂)과 낙육재(樂育齋)·덕애당(德愛堂)·

영리청(營吏廳)·인리청(人吏廳)·재가청(在家廳)·기고청(旗鼓廳)·장관청(將官廳)·

별무사청(別武士廳)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징청각만 남아 있으며

정문인 포정문(관풍루)은 달성공원 북쪽언덕에 옮겨져 있다.


징청각(澄淸閣)

징청각은 감영(監營)에서 관찰사의 관사로 썼던 건물로

“징청”은 깨끗한 정치를 행한다는 의미다. .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 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 건물도 선화당과 같이 세차례나 화재를 입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1807년(순조 7) 경상도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중건하였으며

1970년 중앙공원 조성시 원형을 찾아 옛 모습대로 보수하였다.

(대구시유형문화재 제2호)


징청각 측면


림(碑林)


조국통일의 종


경상감영 축제행사

-전라감영은 전북도청 자리였으나 흔적도 없던것을 2019년 복원 완료하고

2020년 3월 공식 준공을 앞두고 있는것을 보며

경상감영도 필요하다면 인근의 부지를 매입해서라도

제대로된 원래의 관아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는 것은 헛된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