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선산향교
선산향교는 1450년(세종 32)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부사 김용(金涌)이
대성전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건하고,
1624년(인조 2)에 부사 심륜(沈倫)이 명륜당과 청아루(菁莪樓)를 중건하였다.
1967년에 보수하고 1973년과 1975년에 마루와 신삼문(神三門)을 각각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청아루·신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선산향교 전경
선산향교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앞에서 보면 정문이 높다랗다
청아루(菁莪樓)
청아루 기둥
명륜당
청아루 계단에 올라 아래로 보는 정문
명륜당 마루
마루 서편으로 보면 학습재(學習齋)
마루 동편으로 보면 온고재(溫故齋)
대성전의 신삼문
대성전
도량고지단(道良姑之壇)
명륜당에서 본 청아루
청아루안의 서재인 문회재(文會齋)
동재인 보인재(輔仁齋)
정문 너머로 보이는 선산읍내
향교 안내판과 언덕위의 정문
2.선산객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이 건물은 객관(客館)으로 쓰던 건물로, 지금의 선산초등학교 부근에서
일제시대에 옮겨온 것이라고만 전할 뿐 정확한 내력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한편 『일선지(一善誌)』나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서
선산객사에는 남관(南館)·북관(北館)·청회루(淸廻樓)·양소루(養素樓)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의 건물은 어느 건물을 옮겨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 및 코끼리상을 빠짐없이 배치하였고,
추녀마루 끝에도 귀면류의 토제 조상(彫像) 등이 있다.
객사전경
웅장한 기둥들과 천정
측면
선산읍사무소
객사와 음사무소
3.김선궁 유허비
*김씨는 신라 때에 국성(國姓)이었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고려 태조가 일어나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섬멸하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때 탁월한 재질과 뛰어난 지략으로 약관(弱冠) 15세의 나이에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 원훈(開國元勳)이 되고 마침내 일선 김씨(一善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 벼슬은 고려 개국 벽상공신 영문하시중 선주백(高麗開國 壁上功臣 領門下侍中 善州伯)을 지냈고,
고려 정종(定宗) 원년(946)에 다시 대승(大承)으로 추봉하고 시호(諡號)를 순충(順忠)이라 하였다.
그 교지(敎旨)는 다음과 같다.
"나라의 국법은 상벌을 가장 중히 여기나니 공이 많은 자는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이를 보답하고 죄를 범한 자는 엄한 법으로 이를 다스린다.
전 시중 선궁(前 侍中 宣弓)은 그의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고
그 충성된 마음은 일찍이 나라를 받들어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도다.
살아서는 나라를 위하여 밝은 정치를 베풀었고 죽은 후는 그 공훈이 더욱 빛나 청사(靑史)에 길이 남는도다.
이제 다시 벼슬과 시호(諡號)를 내리노니 영혼이 있으면 나의 뜻을 알지어다"
선산 충혼탑 입구
'문화유산산책 > 누.정.서원.향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천 도동서원 (0) | 2020.01.26 |
---|---|
문경 영조대왕 어서각과 근암서원 (0) | 2020.01.22 |
서천 한산 문헌서원 (0) | 2019.12.17 |
함안 무진정 (0) | 2019.11.23 |
밀양 금시당 은행나무 단풍 (0) | 2019.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