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양서원(尼陽書院)은 대구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서원으로
1707년(숙종 33) 곽안방(郭安邦)·곽지운(郭之雲)·곽규(郭赳)·곽황(郭趪)등
4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시 문화재자료 제32호이다.
이 건물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5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청백사(淸白祠), 강당인 경렴당(景廉堂), 신문(神門), 읍청루(挹淸樓),
고사(庫舍) 등이 있는데 사우(祠宇)인 청백사에는 곽안방·곽지운·곽규·곽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읍청루는 대문이다.
현풍곽씨 문중서원으로 매년 2월 중정(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5,000평, 대지 550평 등이 있다.
이양서원(尼陽書院)은 대니산(戴尼山)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니산은 공자의 자인 중니(仲尼)의 니(尼)자를 이고있다,
즉 공자를 머리위에 이고 있다는 뜻인데,
그 대니산의 남쪽을 말하는 양(陽)을 붙여 "이양서원"이라 하였다 한다.
곽안방·곽지운·곽규·곽황 4인의 위패 봉안
2.현풍 추보당(玄風 追報堂)은 이양서원 인근인 현풍면 대리 솔례마을
현풍곽씨 집성촌에서 곽안방(郭安邦)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제청(祭廳)으로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6호이다.
전체적 구성이 조선 후기의 법식을 기초로 한 단아한 격식을 갖추고 있고,
재실과 문중강학소로서의 이중적 기능을 갖도록 의도된 점과,
종택과 제청이 함께 구성된 점 등은 매우 특징적이고 그 사례 또한 흔치 않아
전통건축과 민속적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 곽(郭)씨의 본관은 현풍곽씨, 청주곽씨, 선산곽씨, 해미곽씨,
봉산곽씨, 여미곽씨 등 6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청주곽씨(淸州郭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현풍곽씨(玄風郭氏)에서 분관된 것이다.
현풍곽씨 시조는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 처음 이름은 야로,若魯),
자(字)는 노이(魯以), 호(號)는 암곡(巖谷)또는 초수(樵 )이며, 시호(諡號)는 정의 正懿)이다.
중국 관서지방 홍농(弘農)출신 곽경(郭鏡)은 송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서기1133년(인종대 왕, 재위:1122~1146)때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
청백리 곽안방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字)는 여주(汝柱),
호는 창곡(倉谷)오로, 아들 곽승화와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며.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대구 현풍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쉽게도 곽안방에 대한 기록은 전란 등으로 거의 멸실되어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청백선생실기(淸白先生實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자료가 부실해
그의 생몰연대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인데.
대략 1420년쯤 태어나 1480년 전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세종 말기에 무과에 급제해 해남 현감을 하면서 선정을 펼치자 주민들이
생사당을 짓기도 한바 있으며, 세조 1년(1455년) 세조가 집권하는데
군공(軍功)이 인정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익산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단종이 승하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향리인 현풍 솔례마을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동강마저 목메어 길이 울어라 / 아무도 못 부르네 의제(義帝) 그 혼을
단군의 어진 교하 문명 밝은데 / 검은 안개 길이 덮여 만고 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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