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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昌寧曺門의 뿌리

창녕조씨 창녕재실 일원재

by 안천 조각환 2020. 9. 21.

창녕 일원재(一源齋)는 창녕조씨의 득성설화가 전해지는 화왕산 바로 아래

창녕읍 말흘리59번지(대지585㎡)와 같은 장소 58~2(대지902㎡),

두필지 450여평에 있는 창녕조씨의 재실이다.

1981년도에 서울화수회의 성금으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잘 지어졌었는데

그 뒤 대지및 건물의 소유권분쟁으로 등기를 하지못하고 있다가

2007년 소송에 승소하여 소유권을 회복한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모습은 보기 민망할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다.

 

일원재 (一源齋)

 

대문채가 있던 건물앞은 풀밭인데다 일부만 텃밭으로 이용하고 있고

 기와도 깨지고 허물어져 곧 쓰러질 상황이다.

 

왼쪽건물은 지붕에 천막을 덮어놓고 있다

 

왼쪽건물 앞 모습

 

지붕은 전부 천막으로 덮여있고

건물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간판이 있다.

 

더 크게보면 만옥정서도회(萬玉亭書道會)

 

아마도 서예를 지도하는 서실로 쓰고 있는듯하다

 

옆면

 

옆에서 보면 아직 그를듯하다

 

오른쪽 담장

 

현재의 건물전면

 

건물 초기의 사진

 

초기에는 재실 앞으로 대문채가 큼직하게 있고

지금 서실로 사용하는 건물앞에도 대문이 있었다

이 사진은 아마도 현판식을 할당시 촬영한 사진 같기도 하다

지금은 대문채와 앞담장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철책담장이 쳐져있다

(침고로 이 건물은 본래 창녕성씨의 재실이었는데

서울 화수회에서 매입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재실건물

 

당시 일원재 편액

 

득성지 창녕화왕산하 일원재 창건취지문

(得姓池 昌寧火旺山下 一源齋 創建趣旨文)

 

창녕조씨비조(昌寧曺氏鼻祖) 신라부마 창성부원군 성 조씨(姓 曺氏)

휘 계룡(諱 繼龍) 관지태사공(官至太師公)의 안태지요 득성지인 화왕산산정이,

1,500여년이 지난 금일까지도 산세와 지형 어느 것 하나 변함없이 수려한 모습으로

70만 후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세세년년 참배후손이 끊어지지 않고 줄을 이어니,

천지지신이 따뜻한 가호일지나. 산하에 득성지(得姓池)를 추모하고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제사를 마련치 못하였음을 자손으로써,

위로는 선조에 대하여 불효임을 속죄의 길이 없고,

아래로는 자손만대에 부끄럽기 그지없어, 1981618일 재경화수회에서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산하에 22()에 달하는 제사를 마련했으니,

우리 문중의 득성이래 천여년의 경사라 아니할 수 없다.

 

문장공(매계) 가승(家乘)에 보면 240년전 신유(辛酉)년에 창녕 화왕산하에

시조묘를 설단하고 재실을 지어 재향코자 금일십동(金壹拾銅)창녕거(昌寧居)

순보에게 수송했으나, 재경참판공 하망(夏望) 및 담운공(澹雲公) 명교(命敎)께서

부질없는 짓이라 해서, 경주에 설단(設壇)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금년이 신유년이라 240년전에 못이룬 꿈이 이루어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선조의 깊은 뜻을 알길 없으니 황망할 뿐이다.

창녕 화왕산 영지는 우리 조문(曺門)으로서는 영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제 재사(齋舍)도 마련되었으니 예향(禮香) 할머님을 비롯 묘역없이 결사하는

모든 선조위(先祖位)를 설단하고 제사도 올리며, 용왕제(龍王祭)도 올려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타성(他姓)에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우리 70만 문중은 힘을 모아 득성지를 보호하고 수호하여야 할 것이다.

1981103일 개천절에 재실을 일원재로 이름하여

국무총리실 규창 보(圭昶 甫) 글씨로 현판함과 동시,

문중 다수 참석하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림으로서 첫발을 디디었으니,

전국문중은 성과 열로써 우리의 성지(聖池)를 성역화 하는데

힘을 모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일원재사업추진위원장 조익환(曺翊煥)

 

*참고로 건립당시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짐작코자 창건취지문을 올려본다.

담운공 명교 선조님이 계시던 신유년은 1741년(영조7년)인데

이때는 안강 시조묘를 실전하고 찾기 이전이라 화왕산 아래에

재실을 마련하고자하는 논의가 있었던것으로 보이나,

담운공께서 부질없는 짓이라 하고 경주 안강에 설단을 만든것은,

그뒤 시조묘소를 발견하고 그곳에 종덕재를 마련하여

묘제를 지내고 있는것을 감안하면 선견지명이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당시 이미 지금과 같이 폐허가된 재실을 생각하고 계셨는지도 모를일이다.

당시 이 사업을 추진하던 익환씨는 재력이나 사회적 위치도 한창 좋을때이나

익환씨는 지난해(2022년) 이미 고령으로 작고하였는바

서울 종회에서나 다른 관심과 성의있는 종친 현인이 나타나

잘 살펴서 바람직한 해결이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