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활동의 분지모형이 그대로 살아있는 창녕 화왕산을 찾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백두산 그리고 화왕산에서 만날 수 있는 특이한 모형이다.
화왕산은 높이 756.6m의 그렇게 높지않은 산이지만 바위들로 형성된 악산인데다
동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편이다.
화왕산 산정의 억새평원
(왼쪽 끝이 동문, 중앙은 용지, 오른쪽 끝이 서문, 바로 보이는 곳은 배바위가 있는 남쪽이다
억새로 유명한 산이지만 봄이면 곳곳에 진달래가 곱게 물드는 아름다운 산이다.
화왕산 정상둘레의 2.7km인 석축산성은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창녕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설화의 용지(연못)가 있고
동문쪽에는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得姓之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화왕산 산정
올해는 이른 개화로 산정의 진달래도 이미 끝물이 되어가고 있고
황사도 다소 심한 날이지만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봄의 화왕산을 찾는다.
오늘은 경사가 조금은 덜한 3등산로로 올라 산정을 한바퀴돌아 2등산로로 내려온다.
해발 756.6m의 정상 표지석
정상쪽의 진달래
3코스는 도성암옆으로 가는 길이다.
송림
송림 너머의 도성암
길목의 야생화(각씨붓꽃,줄딸기,매화말발돌이,참나무)
산정부근의 개복숭과 돌배나무꽃
정상표지석 뒷면(창녕의 기상)
화왕산 서북쪽 암릉
북쪽 암릉과 진달래
산성 동남쪽과 중앙의 용지(龍池)
걱정바위
걱정바위 안내판에는
"이 바위는 근심하는 사람의 형상을 닮아 걱정바위라 불리어 집니다.
모든 근심, 걱정 이곳에 털어 버리고 가세요" 리고 적혀있다.
꽃을 피우기 직전인 산정의 철쭉(연달래)
동북쪽 암벽
동북 암릉
억새평원과 동북쪽 암릉
동문쪽에서 보는 남서쪽 억세평원
드라마 허준 셋트장앞의 진달래 군락지(진달래는 끝물)
억새평원의 동서 관람로
북쪽 능선
창녕조씨득성지지 표지석이 있는곳
창녕조씨 득성지지 표지석
이 비는 1897년(광무원년, 정유 丁酉) 6월, 당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官察使)이던
조시영(曺始永,1843~1912)이 창녕조씨 시조 태사공 조계룡(曺繼龍)을 낳게한
화왕산정 용지(龍池) 동쪽인 산성 동문(東門) 근처 자연석(2.5×1,46m)에
170cm×56cm의 구획을 정해 다듬어내고 그 안에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 得姓之地)라 음각하여 세웠다.
주제 시영, 창역 성환(主題 始永, 刱役 成煥)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得姓之地)
정유 육월 일 김산파각(丁酉 六月 日 金山波刻)
사적 제64호인 화왕산성 안에 있는 이 비(碑)는
경상남도 문화재 제246호(2003.04.17), 창녕군 향토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있다.
*참고로 "주제 시영"의 조시영(曺始永)은 매계 조위(梅溪 曺偉)선생의 12대 손이며
김산파각(金山波刻) 이란 김산파가 새겼다는 뜻으로, 김산은 지금의 김천을 말한다.
용지가 보이는 곳
용지(龍池)
화왕산 정상에는 9개의 못과 3개의 샘이 있었는데
가운데 못이 가장 크며 이것이 바로 용지(龍池)이다.
세월이 흘러 차츰 매몰되고 황폐하여 형체조차 없어지는 것 같더니
1958년 초에 호남 사는 종인(宗人) 병의(秉儀) 씨가 막대한 사재(私財)를 들여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3개의 못을 개수하여 완축(完築)하였다.
1990년 초에는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다시 못을 개수하고 못 주위에 철책을 둘렀다.
창녕조씨 득성 설화지
창녕조씨 득성 설화지는 창녕조씨의 시조인 조계룡의 탄생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전설이 깃들어 있는 연못인 용지 3곳과 득성비 1기가 있다.
신라 진평왕 때 한림학사 이광옥에게는 딸 예향이 있었는데 16세에 청룡병이라는
병에 걸려 배가 부어올라 고생을 하여 온갖 정성을 쏟아도 낮지 않았다. 하루는
비범한 사람이 와서 화왕산의 용담에 가서 기도를 하고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했다.
이광옥이 딸을 데리고가 기도를 하는데 하늘이 흐려지며 용담에서 큰 용이 나와
예향을 안고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하늘이 맑아지고 예향이 물속에서 나왔는데
이 후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다. 꿈에 그 아이는 장차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 하였다.
아들은 커서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있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조(曺)'자를 성으로 하사(임금이 내림)하고,
용의 후손이라는 뜻의 "계룡(繼龍)"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니 창녕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득성비는 고종 34년(1897)에 조선말기의 문신인 조시영(曺始永)이
경상(남)도 관찰사로 왔을 때 세운 것으로 "창녕조씨의 성이 비롯된 곳
(昌寧曺氏 得姓之地)"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득성비 : 성을 얻게된 사연을 기록한 비석
조계룡(曺繼龍, 571-651)은 장성하여 진평왕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가 되었고,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과 금자광록대부를 역임하였으며,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라 왕실의 스승이 되었으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서기 651년인 진덕여왕 5년(신해)에 81세로 별세하였으며, 시호는 문의이다.
묘는 경주 안강읍 노당2리 자옥산 아래 초제동에 있다.
성곽옆의 복숭아꽃
용지(왼쪽)와 창녕조씨 득성지지 비석(오른쪽), 그 오른쪽은 동문이다
멀리 허준 셋트장이 보인다
화왕산성 동남쪽 절벽
멀리 조금전 다녀온 화왕산 정상과 산성 서문쪽
배바위와 설화
안내판의 배바위 설화에는
"온 세상이 물난리로 물에 잠겼을 때 이 바위에 배를 묶었다고 하여
배바위라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또한 배바위 위에 움푹 들어간 홈이 있는데
이는 전란 때 곽재우 장군이 이 물로 세수를 하여 곽재우 세숫대야라 합니다."
황사속의 창녕읍내
하산길의 고래바위와 부부 소나무
고래바위 앞 안내판에
"이 바위는 고래형상으로 고래는 강인함을 뜻합니다.
고래의 숨구멍 부분에는 금슬 좋은 소나무 부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창녕군의 애틋한 부부 금슬을 상징합니다.
부부 소나무를 보며 서로 손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더욱 두터워집니다."
연달래
화왕산 3등산로로 올라 산성을 한바퀴 돌아보고 서문인 2등산로로 내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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