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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경주 오봉산 주사암과 선덕여왕

by 안천 조각환 2020. 12. 9.

주사암(朱砂庵)은 경주 서면 오봉산(五峰山)정상에 있는 암자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주암사(朱巖寺)라 하였었다.

암자옆에는 깍아지른듯한  절벽을 이룬 엄청나게 넓고 큰 마당바위가 있는데

이곳은 MBC에서 상영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이기도 하다.

 

해발 685m의 암반위에 세워진 주사암 입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1편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바위 사이의 주사암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 천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설화에 의하여 절 이름이 주사암이 되었다고 한다.

 

바위산정상으로 공간이 좁아 대웅전을 중심으로 일렬로 절집이 지어졌다
영산전 주사암
마당바위
완전 직각의 마당바위
마당바위에서 본 주사암 쪽
마당바위 상부
오봉산 정상
해발 685m 정상표지석
오봉산 나무갤러리
정상 곳곳에 걸려있는 나무 갤러리 작품들

모든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온다.

모든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온다.

 

빈손(空手)

나를 묻을때는 나의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천하를 손에 쥔 나도 죽을 때는 빈손이란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네. 

-알렉산더 대왕-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겨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

 

인연도 텃밭이랍니다. 그래서 가꿈이 필요하지요.

마음밭에 어느날 설렘이라는 씨앗을 심어놓고

사랑은 태양이 되고, 배려와 양보를 비료삼아

기다림이란 물을 주어야 환희라는 꽃이 피어난다는군요.

 

주사암의 흰둥이
경주 낭산의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년)이며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자장법사를 당에 보내 불법을 수입했고, 분황사, 첨성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했다.
647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란 당시 병사했다.

선덕왕릉은 주머니를 닮았다는 경주 낭산능선에 있으며 사적 제182호이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장녀로 기록되어 있지만

필사본인 "화랑세기"에는 차녀로 되어 있다고 한다.

632년 진평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숨지자 화백회의를 열어

선덕여왕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성조황고’라는 단어에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선덕여왕은 634년에 분황사를 지었으며 같은 해 영묘사도 창건했다.

642년에는 불법을 배우러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자장(慈藏)이 귀국했는데.

그의 권유에 따라  호국 의지를 담아 황룡사 9층탑을 축조했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이 목탑은 이웃나라 아홉 적을 상징하는 9층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동양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瞻星臺)를 남겼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세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첫째,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시간이 흘러 꽃이 피었지만 그 꽃은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았다.

신하들이 이에 대해 물으니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건천 여근곡

둘째,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이다.

636년 궁 서쪽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수만 마리의 개구리가 모여들어

사나흘 동안 계속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곧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군사 2,000명을 데리고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갈 것을 명했다.

그리고 그곳에 반드시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알천은 이를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 있던 백제의 장군 우소와 군사들마저 모조리 죽였다.

이에 대해 선덕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했다.

 

셋째, 선덕여왕은 죽을 날도 스스로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 “내가 몇 년 몇 월 며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 하고 말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의 위치를 묻자,

선덕여왕은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만 했다.

그 말대로 그날에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신하들은 낭산 남쪽 양지에 장지를 마련했다.

이후 10년 후 선덕여왕의 조카인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 따르면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되어 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이다.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파견해 난을 진압하던 중

평소 앓고 있던 신병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