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 민족시를 발표하여
민족정신을 드높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이다
본관은 경주(월성)이고. 호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이다.
그는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에게 교육을 받았다.
1916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해 1919년 수료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가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 가담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2년 백조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單調" 를 발표하고,
이어 "가을의 풍경"(1922. 5)· "나의 침실로"(1923. 9)·
"이중의 사망"(1923. 9)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는 "개벽" 5월호에 발표한 시 "구루마꾼"· "엿장사"· "거러지" 등과
평론 "무산작가와 무산문학" (개벽, 1926. 1~2)·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
"문예운동", (1926. 1) 등을 발표했으며, 1926년 "개벽" 6월호에는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발표하였다.
그밖에 산문시로 "금강송가"(여명 1925.6), "몽환병(조선문단 1925.10)등이 있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와 원고압수,가산탕진등으로 낙담한 그는 술에젖어 세월을 보낸다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5년경에는 상해에서 형 이상정장군을 만났는데 그 일로 5개월 옥살이를 한다.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으며,
1940년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3년 위암으로 죽게되며, 묘지는 상인동 상화기념관 뒷편 가족묘지에 있다.
이상화는 50여 편의 시와 10여 편의 산문을 남겼지만 생전에는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사후에 펴낸 "늪의 우화"(1969), "나의침실로"(1977), "석인상"(1984) 등의 시집이 있다.
이장가(李庄家)란 경주(월성)이씨 금남공파와 논복공파를 함께 일컫는 가문명으로
금남 이동진 선생이 재산 일부를 가족과 친지, 종족들을 위해 나눈 일을
‘이장(李庄)’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경에 제례문화의 간소화를 위해 결단하고
실행한 가족묘지와 제각, 그리고 돌에 새겨놓은 절목 등을 보노라면
이장가(李庄家) 집안이 적어도 100년이상 앞을 내다본,
얼마나 선각자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각(祭閣)
제각(祭閣)은 무덤 근처에 제청(祭廳)으로 쓰려고 지은 집이다.
즉, 모든 제사는 묘소 앞이 아니라 본 건물안에서 이루어진다.
본 건물은 錦南公 李東珍(금남공 이동진) 선생의
손자인 肯南 李相岳(긍남 이상악)선생이
부친인 小南 李一雨(소남 이일우)선생의 사후인
1939년에 완공한 건물로 새로 지어진 齋室(재실 :본디 제각과 비슷한 의미이나
본가에서는 재사는 제각에서, 제사 후 회의나 담화는 재실에서 나눈다)과는
달리 지어진 초기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편 본 제각은 6.25사변당시 이 일대까지 침입한 북한군 모 대대가
막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중구 서성로에 위치한
소남 이일우 고택이 6.25 당시 국군지휘부로 사용된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본 제각은 본래 열린 구조였는데 북한군 침입 이후
철문을 설치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 비(碑)는 묘지아래 재각옆에 있는데
앞면에는 묘지조성의 연혁이, 뒷면에는 절목이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그 옆의 안내판에는 아래와 같이 국한문 혼용으로 알기쉽게 적어 놓았다.
節目(절목)
절목은 조목과 같은 뜻으로써 법률이나 규정 따위의 낱낱의 조나 항목을 뜻한다.
즉 집안의 법이다. 이장가의 절목은 주로 허례허식없이 제례를
지내라는것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어 당시에는 파격적이었고,
그래서 가정의례준칙의 주요 참고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본 항목은 소남 이일우 선생의 부친인 금남 이동진선생의 뜻으로 본 비(碑)는
1939년 금남의 손자 긍남 이상악 선생이 가족묘지를 꾸미면서 제작되었다.
절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忌祭廢止(기제폐지) : 기제사는 폐지한다.
1.墓祀春秋兩節(묘사춘추양절) : 묘사는 봄.가을 두차례 지낸다.
1.祭需玄酒棗栗時果三品魚肉兩脯(제수현주조율시과삼품어육양포)
: 제수는 밁은 물, 대추, 밤, 계절에 따른 과일 세가지, 어포와 육포 양포로 하라.
1.祭器竹器(제기죽기) : 제기는 죽기를 사용하라.
1.祭儀與忌同式(제의여기동식) : 제사 의례는 기제사와 같은 방식으로 하라.
1.鄕祀費(향사비) : 향사(제사)비
1.墓地守護費(묘지수호비) : 묘지수호비
1.土地管理費(토지관리비) : 토지관리비
1.以上諸費餘財付宗産增殖功物子孫私事分用而 但宗孫不贍時宗議補宗事
(이상제비여재부종산증식공물자손사사분용이 단종손불섬시종의보종사)
: 이상의 모든 비용을 쓰고 남은 재산은 종산으로 하되
증식된 종재를 자손들이 사사로이 나누어 쓰지는 마라.
단 종손이 넉넉지 못할 때는 종의를 모아 종사를 보존 하도록 한다.
1.宗財宗孫管理而宗孫不能堪任則支孫中可任者 宗義選定管理次代宗孫傳掌事
(종재종손관리이종손불능감임칙지손중가임자 종의선정관리차대종손전장사)
: 종재는 종손이 관리하는데 종손이 능력이 없어서 맡을 수가 없을 때는
자손중 가능한 자를 종의로 선정하여 관리를 시키되
다음 종손의 손바닥에 쥐어주도록 하라.
이곳은 제각 뒷편으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꼭 사찰의 적멸보궁처럼
재각안에서 제단과 묘소가 모두 보이도록 되어있어,
바로 묘소앞에서 제례를 지내는것과 같도록 설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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