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은 구룡포와 가까운 포항 장기면 서천리에 있는데
장기면은 전남 강진, 제주도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장기현 이었던 이곳은 조선 태조1년 설장수를 시작으로
211명이나 유배생활을 하고 거쳐 간 것으로 전해지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이곳에 유배문화 체험촌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특히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의 유배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는데
우암 송시열은 4년 여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또한 취성도를 완성했으며, 포은 정몽주선생의 신도비문을 비롯한
많은 양의 시문도 창작하였으며, 다산 정약용은 220여 일 동안 장기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를 글로써 남겼는데,
장기농가 10장, 기성잡시 27수, 타맥행 등 130여 수에 달하는 시문과
이아술, 기해방례변, 촌병혹치 등의 서책도 저술하였으나 유실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1392년(태조 1년) 7월 30일 문하시중 설장수 부터 1895년(고종 32년) 8월 1일
이근용까지 총 79건 117명(남자 98, 여자 19)의 유배인 명단을 새겨 놓았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1801년 1월 19일 신유박해
즉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그해 10월 20일까지
7개월 10일(220일)간 마현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집에서 기거하였는데,
머무는 동안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기성잡시 27수, 타맥행 등 130여 수에
달하는 시문과 이아술, 기해방례변, 촌병혹치 등의 서책도 저술하였다.
다산의 유배길은 석우촌~사평~하담~탄금대~무교~조령~함창~경주~장기로 이어졌다
다산은 장기에 도착한 다음날인 1801년 3월 10일부터 마현리 구석골의
성선봉집을 배소(配所)로 정하여 그해 7월 20일까지 있게됐다.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제2차 예송사건으로
덕원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원년인 1675년 6월 10일 장기에 도착하여
장기성 밖 마산리 사인(士人)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 되었다.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4년여동안 머물렀다.
우암은 장기 도착 당시 동생들은 물론 부실과 아들, 증손자까지 함께 했는데
비록 유배인의 몸이었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말해준다.
또한 인맥들도 장기를 많이 방문하였는데 그 중 1676년 2월 3일에는 소론의 영수인
윤증(尹拯)은 물론 인근의 유수한 수령과 학자들도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송시열과 정약용 배소사이의 정자(망향정)와 그 옆으로 유배인들의 시 석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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