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매원마을은 조선시대에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의 3대 반촌(班村·양반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마을)이라 일컬어 왔던곳이다.
매원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는 매화낙지형(매화가 떨어진 모양)이라고 했다.
매화의 꽃잎처럼 뒤로는 용두봉, 동쪽은 장원봉, 서쪽은 자고산과 산두봉의
반월형(반달 모양), 남쪽은 금무산과 안산이 원형을 이루고 있다.
칠곡 왜관의 매원마을 주변은 금장지구로 묘를 쓰지 않는 풍습이 있다.
오래전에는 이 마을에 원이 있었으며 한양을 가는 길목이라 말을 메고 쉬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한데, 칠곡군 군화를 매화로 정한 이유도 매원의 역사적 배경이다.
원래 이 마을은 야로 송씨와 벽진 이씨가 살았었는데
1595년(선조 28년)경 신동 웃갓마을에 살던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1569~1634)가
동솔밭 아래쪽에 초당을 지어 서재로 거처를 하며 웃갓마을에서 내왕을 하다가
1622년 겨울에 이곳 매원으로 이주하면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매원마을에서 산하나를 넘으면 석담 이윤우가 처음 살았던 신동 웃갓마을이다.
그래서 매원마을은 이곳 신동 웃갓마을에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석담 이윤우(李潤雨)는 본관이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이다.
성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었고,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다.
이어 예문관응교· 사간· 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집(石潭集)이 있다.
이곳 칠곡 신동 웃갓마을 경수당(敬守堂)은 이윤우가 살았던 자리에 지어진 가옥으로,
이후에는 대한제국 법무 형사국장을 지냈던 김낙현이 거주했다.
원래 신리(신동) 208번지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주후가 매입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벽진이씨 후석파의 종택으로 삼았다.
특히 경수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을 "담양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윤우가 담양부사로 재임하는 동안 청빈하게 살며 선정을 베풀자
이에 고마움을 느낀 담양사람들이 보답을 하고자 직접 찾아와
담양지역의 방식으로 특색있는 담장을 쌓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감호당앞 담장
매원마을은 1905년경이 최대 번성기로 400여 가구가 살았으며
맨 위쪽을 상매라 하고 중간을 중매, 아래 부분을 서매(하매)라 부른다.
본래 300여 채의 한옥과 200여 채의 초가집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낙동강 전투)으로 인해 거의 다 소실됐고
60여 채가 남아 있었으나 최근 복원 사업을 추진한 후 한옥이 늘고 있다.
이 마을은 2021년에 국민의 힘(제1야당) 대표가 된 이준석의 윗대 고향이기도 하다.
감호당 전경
감호당은 선조 때 가선대부 공조참의를 지낸 석담 이윤우가
광해군 시절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고 광해(14년) 1622년에 향리로 돌아와
1623년에 지은 감호당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강학지소(도학과 학문을 가르침)다.
여헌 장현광과 우복 정경세, 석담 이윤우가 학문을 서로 논의하던 곳이기도 하다.
감호당 마루(전면)
석담 이윤우선생의 후손으로 26명이 문과의 대과에 장원급제가 배출됐으며
4대 한림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매원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장원봉이라 부른다.
그 후 셋째 아들인 감호당 이도장(1603~1644, 지평, 이조좌랑, 합천군수 역임)이 계승하여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곳으로, 몇 차례의 중수후 원형이 잘 보전되고 있다.
감호당 편액(왼쪽)은 미수 허목의 글씨(전서체로 음각한 편액)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광주이씨 박곡종택(대사헌을 지낸 박곡 이원록의 집)은
안채가 12칸, 사랑채가 8칸, 광채가 3칸, 대문채가 5칸, 중문채와 사당 등
86칸으로 이뤄져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6·25 전란에 소실됐다.
사송헌은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6·25전까지 이곳은 매원 초등학교 임시 학교로 사용한 건물이기도 하다.
역시 전란에 소실됐으나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다시 복원된 건물이다.
그외 용산제, 귀후제, 관수제, 아산제, 이석고택 등 많은 재실과 고택이 있다.
칠곡 진주댁은 박곡(朴谷) 이원록(李元祿)의 9세손 상립(相立)이 건립하였다.
원래 안채·사랑채·곳간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진 부유한 양반가의 주택으로 보이나
현존하는 안채와 사랑채는 일제 강점기의 새로운 양식이 부분적으로 수용되긴 했지만,
대체로 매원마을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이 계승·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칠곡 중방댁(中芳宅)은 1860년에 건립된 상류 주택으로 정침과 우익사 일부가 남아 있고,
아랫채를 비롯한 몇 동의 건물이 퇴락해 소실되었는데 근년에 후손들이 수리해 관리하고 있다.
해은고택 바로 앞집으로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1.5칸 규모의 ‘一’자형 집이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정지 2칸, 큰방 2통칸, 대청 2칸, 아랫방 2칸을 배열하고
정지를 제외한 6칸 전방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해은고택(사랑채)
해은고택의 안채는 조선 정조 12년에, 사랑채는 1816년(순조 16)에
이동유(1768~1836)가 건립하였고, 그의 후손인 이이현(李以絃)의 호를 따서
해은고택(海隱古宅)이라 부르고 있다.
해은고택 안채
지경당은 경북 남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튼 ‘ㅁ’자형 배치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고를 둔 안채의 공간구성과 팔작 지붕처럼 꾸민 가구와 지붕의 구성이 돋보이며,
사랑대청 상부의 흔치 않은 천장형식이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0호다
골목의 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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