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일(佳日)마을은 풍산읍에서 하회마을 조금못간 오른쪽 풍천면 가곡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가곡지(佳谷池)라는 못이 있고, 정산(鼎山)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바로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가일마을이며, 퇴계 이황의 처향(妻鄕)이기도 하다.
정산은 소산(素山)에 곧바로 이어져 있는데, 두 봉우리가 산세의 흐름에 따라 같은 높이로
앞뒤로 나란히 벌어져 있어 솥가마[鼎]처럼 안정되어 있다 하여 정산(鼎山)이라 불렀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왕(王)씨가 살았고 그 뒤에 풍산 류(柳)씨가 대대로 살았다.
이후 고려 개국공신 태사공 권행(權幸)의 후손인 안동 권씨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어 살아온 곳으로, 세종 때 정랑을 지낸 참의공 권항(權恒)이
이곳 풍산 류씨 입향조인 전서공 류중혜(柳從惠)의 숙부인 류개(柳開)의 손자
류서(柳湑)의 사위가 되어 처음 터전을 잡게 되었다.
가일마을에는 시조 권행의 후손인 입향조 권항 이후, 화산 권주, 병곡 권구등이 살았던 곳으로
병곡종택, 수곡고택, 권성백고택, 남천고택, 야유당, 노동재사, 동곡재사 등이 있다
현 가곡리는 마을의 옛 이름인 가일과 지곡에서 한자씩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동권씨 병곡종택(시습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8호)
병곡종택은 조선 전기 문신인 화산 권주(花山 權株, 1457∼1505)가 생전에 살던 집이다.
그는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주서를 거쳐 성종 20년(1489)
공조정랑으로 요동을 오갔으며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4) 갑자사화 때, 그가 성종 13년(1482) 승정원주서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살해되었다.
그가 죽자 가족들이 예천으로 이주하여 이곳은 빈집으로 방치되었다.
그 뒤 18세기 중엽부터 후손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8세기 중엽 후손들이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시습재(時習齊)’란 이름을 가진 이 집은 6칸 규모의 건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북동쪽에 사당이 있다
사랑채앞에 걸린 편액 시습재의 시습(時習)이란 논어의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易說乎)에서 따온 글이며.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이다.
퇴계 이황은 27세에 첫부인 허씨가 죽고 30세에 재취(再娶)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이댁의 화산 권주가 처조부가 되며, 화산의 맏아들 권질(權礩, 1483~1545)이
장인이 된다. 권질의 따님인 권씨부인도 이황이 46세때 타계하였다.
퇴계는 63세때인 1563년 외조부 산소 성묘길에
처조부와 장인의 묘소를 참배하고 각각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시로 남긴다.
제참찬화산권선생묘도(題參贊花山權先生墓道) -참찬 화산 권선생(권주, 처조부) 성묘길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어려운때 격은 고난 운명이 아니랴
무성한 송백에 검은 연기만 자욱하네.
절행이야 훗날의 역사에 남겠지만
문장이 전하지 않아 천고에 한이로다.
외구봉사공묘도(外舅奉事公墓道) -봉사공(장인 권질) 성묘길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옛날 그 땐 참사람을 몰라보고
까닭 없이 저승으로 이 분을 데려갔네.
고향으로 돌아와서 묘사를 지낸 후
매화 피는 모습보고 장인 생각 하옵니다.
안동 수곡 고택(국가민속문재 제176호)
안동 수곡 고택(安東 樹谷 古宅)은 1792년(정조 16)에 권조(權眺)가
할아버지 권보(權䋠, 호 樹谷)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권보는 일생동안 도학(道學)에 전심하며 검소를 생활신조로 삼았던 사람이다.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외양만 둘러 본다
안동 권성백 고택 입구와 회화나무
이곳 가일마을은 마을입구의 300수십년된 회화나무부터
고택마다 한 두 그루씩의 오래된 회화나무가 서있다,
안동 권성백 고택(安東 權成伯 古宅)은 양반집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는
조선 후기의 기와집으로,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건축 양식으로 보아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설비가 합리적이며 건축부재도 튼튼하고 충실하여
장중한 멋을 풍기는 조선 후기 주택의 좋은 예이다.
원래 명칭은 "안동 권태응가옥(安東權泰應家屋)"이었으나
현 소유자의 증조부인 권병우가 입촌한 이래 그 아들 권중은(字 : 성백 成伯)이
구입한 가옥으로 자(字)를 따라 "안동 권성백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안동 남천고택(安東 南川古宅)은 권장(1802~1874)이 1850년(철종 1)에 셋째 아들
권숙(1832~1901)의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로 권숙의 호(남천)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4호로 지정(1996.12.5)되었다.
참깨를 말리고 있는 사랑채앞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은 930년(고려 태조 13년) 고창군(高昌郡, 지금의 안동)에서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상(大相)으로 임명되었는데 "고려사"에는 흔행(昕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서는 본성이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본명이 김행(金行)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은 그의 전공을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
(능병기달권, 能炳幾達權)" 고 하며 권(權)씨 성을 사성(賜姓,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름은 행(幸)으로 바꾸었으며, 권행의 묘는 안동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다.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 세 사람은 고려 창업의 공으로
삼한벽상아부공신(三韓壁上亞父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제수 받았으며
983년(성종 2) 이 세 명을 기리기 위해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三太師廟)가 세워졌다.
잘 꾸며진 가곡지 둘레길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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