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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성주 역사테마공원과 성주이씨 유래(由來)

by 안천 조각환 2021. 9. 9.

성주역사테마공원에 가면 우선 2020년에 새로 재현된 성주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안쪽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실록각, 왕립 천문관측시설인 봉두산 관천대, 

성을 돌아 봉두산 옆으로 나오면 임정사, 그리고 남쪽에는 성주이씨의 재실인 봉산재가 있고

봉산재 앞에는 성주이씨가문의 유명 문인, 정치인들이 남긴 시비동산을 만날 수 있다.

시비동산에서는 눈에 익은 이직의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등의 시비가 있다.

성이 사라진 성밖숲에서는 수령 500여년된 왕벗나무 57그루를 만날 수 있다.

 

성주읍성

 

성주읍성은 1380년(고려 우왕 6) 토성으로 축성되었다가

1560년(조선 중종 15)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성문은 1591년(선조 24)에 건설하였다.

성주목읍지(星州牧邑誌)에는 읍성 둘레가 약 2.1km(6,755尺)의 큰 읍성이었다고 한다.

성주군에서는 성주의 옛 모습을 재현코자 성곽 270m등을 2020년 10월 축성하였다.  

성주는 현재까지 성주읍 성산리, 월항면 수죽리 등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이

성산가야시대와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유적으로 미루어보아

삼한시대에는 성산가야(星山加耶)의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쌍도정((雙島亭,연못)

 

쌍도정은 조선시대 성주관아의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의 이름으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그린 작품

"쌍도정도(雙島亭圖)" 를 토대로 2020년 이곳에 재현하였다고 한다.

사각형의 연못 속에 석축으로 둘러 싼 2개의 섬이 조성되어 있어

쌍도정이라 불렀다고 하며 왼쪽 섬에는 나무만 심어져 있고

오른쪽 섬에는 정자가 설치되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

 

비림(碑林)

 

성주가 가장 번성하던 때인 1018년 고려조정에서는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가 파견되어 

고령군(高靈郡)·약목현(若木縣)·지례현(知禮縣)·가리현(加利縣)·화원현(花園縣)·황간현(黃澗縣)·

팔거현(八莒縣)·김산현(金山縣)·관성현(管城縣)·안읍현(安邑縣)·양산현(陽山縣)·

이산현(利山縣)·대구현(大丘縣)·하빈현(河濱縣)·인동현(仁同縣) 등 1군 14현이 귀속되어

그 위세가 크게 떨쳐졌으며 1308년에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경산부로 강등되어, 조선건국 이후에도 경산부로 지속되다가

1413년(태종 13) 성주목으로 다시 승격되면서 가리현·팔거현·화원현을 예속하였다.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성주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이 형성되었을 때 주전선(主戰線)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공산군에 의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실록각(實錄閣) 전경

 

실록각은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 안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집을 말한다.

실록은 편찬이 완료되면 사고(史庫)에 봉안하는데, 조선 세종 때 중앙의 춘추관과

지방의 성주(星州), 충주(忠州), 전주(全州) 등 세 곳에 사고를 두었었다.

임진왜란 때 성주, 충주사고가 불에 타 소실되고 전주만 남게되자

이후에는 춘추관 외에 정족산(鼎足山), 적상산(赤裳山), 태백산(太白山), 오대산(五臺山)에

사고를 두고 부근의 전등사(傳燈寺), 안국사(安國寺), 각화사(覺華寺), 월정사(月精寺)를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지정하여 주지(住持)를 총섭(總攝)에 임명하고 지키게 했다.

성주군에서는 세종 때 성주에 있었던 실록각을 재현한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1,893권 888책이다.

 태종13년(14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 때에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상례이다,

단종 2년(1454) "세종실록" 부터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정초본(正草本) 외에

활자로 3부를 더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다.

 

실록각 입구

 

정치의 잘잘못과 왕의 선악 및 신하들의 간위(奸僞) 등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편찬은 관장사초(館臧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등 시정기(時政記)를 모아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하였다.

필사본, 인본(印本).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각 건물

 

조선왕조실록 중 태백산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제외한

실록이 소실되자 1606년(선조 39)에 설치한 외사고본(外史庫本)  848책으로

현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보관되어있다.

참고로 시정기(時政記)란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에서 관장하여 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 실록을 편찬할 때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었다.

 또한 사초(史草)란 넓게는 실록 편찬의 모든 자료를 의미하지만,

사관(史官)들이 기록한 1차 자료를 사초라 하며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관장사초(館臧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었다.

사관은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를 직필(直筆)이라 하였으며, 사관의 직필은 국왕이나 고위 관원이라 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도록 법령(法令)과 제도로 보장되었다.

 

관천대(觀天臺)

 

관천대(觀天臺)는 왕립 천문관측시설로 일명 간의대(簡儀臺)라고도 한다.

1432년(세종 14)에서 1434년 사이에 간의 등 천문기구를 만들었는데,

그 중 관천대(觀天臺)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자, 너비 32자, 길이 47자의 규모로

쌓아 만들었는데 이를 본보기로 읍성 제일 높은 곳인 봉두산위에 설치하였다.

오른쪽은 읍성이 끝나는 지점이고, 왼쪽은 임정사 쪽이다

 

임정사 앞 봉두산(鳳頭山) 산왕대신상(山王大神像)

바위솔

 

이제 막 꽃을 피우는 꽃무릇

 

봉두산  임정사(林淨寺)

 

임정사 입구

 

가을을 알리는 석류

 

성주이씨 시비공원과 봉산재 전경

 

이 봉산재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이 살았던 옛 집터이다.

 

성주이씨 유래비와 투금탄 이야기 비

 

성산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조(840~856)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으로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는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인 이곳으로 옮겨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봉산재(鳳山齋) 입구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손자 중 승경(承慶)이 중국 요양성 참지정사가 되어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농서군(隴西郡) 선칙봉군 하고 위 2대도 농서군에 추봉되어

한때는 농서이씨로 부르기도 했다.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된 지명을 따라

관향을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봉산재 전경

 

한편, 이장경의 손(孫) 이천년(李千年)의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농서이씨 라고도 하였다.

 

사당인 상덕재 오르는 계단

 

명나라 때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이 그의 후손이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 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이장경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후대 8세(世) 이내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이나 나왔다.

 

사당인 상덕사 출입문

 

상덕사(尙德祠)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소는 처음에는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나라에서 길지를 찾아 이곳에 세종 왕자들의 태를 안치한 

태봉이 되면서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이장을 명하여, 1443년 대가면 옥화리 중리마을

능골 오현으로 옮겼으며 여기에는 유품전시관과 재실인 영모재와 오현재가 있다.

한편 이장경의 신도비는 벽진면 자산리에 있다.

 

재실앞에 있는 성주이씨 시비공원의 이직 시비

 

영의정 형재 이직 시(領議政 亨齋 李稷 詩)

 

오로시(烏鷺詩)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이직(李稷,1362~1431) 조선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이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경순부주부, 밀직사우부대언, 예문제학등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가 1422년(세종 4)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으며,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있다. 

 

매운당 이조년 시비

 

다정가(多情歌)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1269~1343)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 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밤은 깊어 삼경인 때에

나뭇가지에 깃들여 있는 봄의 정서를 소쩍새야 알리가 있으랴마는

다정한 것이 병처럼 되어서 잠을 못 들고 있노라.)

 

이조년의 투금탄(投金灘) 이야기

 

이장경의 넷째 아들이며 이조년의 형인 이억년이 개성유수(고려의 수도 현 개성시장)의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양으로 떠날때, 그의 동생 이조년은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하기 위해 같이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금뭉치 두개를 주워 두 형제가 한개씩

나누어 가지고 양천(현 양화대교 아래)강의 양화도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게 된다.

배가 중간에 이르렀을때 아우인 이조년이 주운 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 이억년이 그 연유를 물으니 아우가 대답하기를 저는 평소 형님을 깊히 공경해 왔는데

항금뭉치를 나누어 가진 순간부터 홀연히 시기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이는 황금이란 착하지 못한 물건 때문임이 느껴져서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형 이억년이 "너의 마음이 참이로구나, 나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도다"

라며 자신이 가졌던 황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 일화는 "고려사 절요" "고려사 열전" "양천 읍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 이때가 고려 충렬왕 20년(1294년)경이며,

그 이후 이곳을 투금강 또는 투금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이며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의 다섯째 아들로,

고려후기 장령,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이다.

 

임진왜란 명장 이여송 시비

 

1592년 임진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안주(安州)에 이르자

서애 류성용이 제독을 영접하고 병란의 일을 함께 논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이여송은 부채에다 시를 써서 서애선생에게 보내왔다.

 

선 시(扇 詩)     ~ 이여송(李如松)

 

군사를 이끌고 별이 빛나는 밤에 강을 건너니

삼한이 평안치 못하다고들 하네.

 

명명하신 주상께서 날마다 승전소식 간절한데

이 사람은 밤마다 즐기는 술도 끊었노라.

 

홀연 봄기운에 마음은 더욱 장쾌하기만 하니

내가 가는 이 걸음에 왜적들의 뼈가 서눌하리라.

 

우스개라도 승산 없다 함부로 말하지마오 

꿈 속에서도 상시 출정하기만을 기다린다오.

 

이여송(李如松,1549~1598)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군의 한사람으로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이다.

 명나라 장수이긴 하나 그의 윗대인 성주이씨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인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여 농서이씨 라고도 하는데 바로 그의 후손이다.

 

백년설 노래비

 

번지 없는 주막  -백년설(白年雪)

 

1.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던 그 밤이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가수 백년설(白年雪, 1914~1980)의 본관은 성주이씨로 성주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이며, 1964년 이창민(李昌民)으로 개명했으나,

백년설이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28년 성주공립보통학교와 1931년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백년설의 대표곡으로는 두견화사랑, 나그네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등이 있다.

 

시비공원에는 소개한 시 외에도 많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충헌각(忠獻閣)

 

읍성안 북문아래 있는 이 충헌각(忠獻閣)은 조선조 신임사화로 유배됐던

몽와 김창집(1648~1722) 선생을 기리는 비각으로

이 비각은 6.25 전쟁 때 파괴됐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읍성안에서 본 북문인 민락루(民樂樓)

 

성밖숲 왕버들

 

성밖 왕버들숲은 몇백년이 흘러도 무성한데 숲속 맥문동은

모두 다시 심는 관계로 예년에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숲은 다음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