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3대왕인 태종 이방원은 태조의 아들 중 학문이 가장 뛰어 나서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며 아버지 이성계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로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조선 건국에 많은 공은 세운 인물 중 하나다.
그는 함흥 귀주동에서 태어났는데 태종 임금으로 즉위하자, 그 해인 1401년
함주에 있던 어태를 길지인 성주 용암면 조곡산으로 옮겨 태실을 조성하였다,
태종은 이를 기념하여 당시 경산부에 속해 있던 성주를 성주목으로 승격시켰다.
세종대왕자(子) 태실(태봉)
이어서 4대왕인 세종도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24)사이에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를 현 성주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 태봉정상에 봉안하게된다.
태봉이 된 이곳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의 지관이 이 자리가 명당임을 왕에게 고하여 이장경의 묘는 대가면 능골로 이장시키고,
이곳에 태실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때 태실 바로 앞 선석사 영각에 있던
이장경의 영정도 안봉사 영각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안산영당(현 벽진면 자산리) 자리이다.
역사속의 이야기를 따라 성주의 명당과 길지 이곳 저곳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세종대왕자 태실(태봉) 오르는 길
앞 오른쪽 거북받침이 있는 세조 태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바탕만 있는 곳)은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단종이 원손이었을 때 조성한 태실 1기는 세자로 책봉된 뒤 성주 가천
법림산으로 옮겨 새로 조성하였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이곳에 있던 태항아리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으로 이전 되었다.
태봉에서 본 선석산
선석사 입구
이장경의 영정이 있었던 선석사(禪石寺)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 1년(69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있었으며 신광사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주지로 부임한 뒤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했는데. 이 어필을 보관했던 어필각이 있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선석사 동종
선석사 아래에 새로 조성된 태실문화관 앞 담장
태실문화관
태를 태실로 봉안하는 행렬(재현)
태 항아리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隴西郡公 李長庚) 묘역
원래 선석산에 있던 이장경의 묘를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를 묻게되자
세종대왕이 특명을 내려 길지를 택해 하사하였는데, 바로 성주의 서쪽
서오치(西梧峙)의 남쪽인 이곳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능골로 이장하게 된것이다
위는 이장경의 묘이고 아래는 부인 합천이씨의 묘이다.
이장경(李長庚)은 고려시대 중기의 호족으로 사후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이백년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이천년은 참지정사,
이만년은 문하시중, 이조년은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아들들의 출세로
고려조로부터는 삼중대광 문하좌시중(三重大匡 門下左侍中) 흥안부원군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都僉議政丞 知典理司事 上濩軍)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손자 이승경이 원나라에 입궐하여 출세하자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되었다.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
이장경은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신라 말의 재상 이순유(李純由)의 12대손이며
이득희(李得禧)의 아들로 성주(옛 지명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장경의 아버지인 이득희는 태몽에서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 현 성주)에
떨어지는 것을 본 후 이장경이 출생한 까닭에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경은 문창, 태백성의 다른 칭호였다.
그뒤 성주군수로 부임한 합천이씨 이약(李若)은 이장경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세에 반드시 창성할 것이라 예상,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이장경은 부인 합천이씨에게서 아들 5명이 태어났으며, 생전에 상호장(上戶長)과
안일호장을 지냈고, 흥양 성산사(星山祠), 단성 안곡사(安谷祠), 울곡 보본사(報本祠),
정평 보덕사(報德祠) 및 김천 상친사(尙親祠), 옥천 평산사(坪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묘소 뒷편인 이곳에도 석축을 쌓았고 묘소 옆으로도 석축을 높이 쌓아
엄청난 량의 흙을 많이 돋운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상 길지를 보완한것으로 보인다.
묘소에서 본 재실(앞)과 안산
재실 뒤편의 성주이씨 시조석비와 제단
성주이씨 신라재상 순유제단비(星州李氏 新羅宰相 純由祭檀碑)
유물전시관과 뒷편으로 보이는 묘소
오현재(梧峴齋)
구 재실인 영모재
재실앞 공덕비
전 대구시장 이해봉 공적비(국회의원 성주이공 해봉 공적비)
안산영당(안산서원) 전경
안산서원
서원강당 마루(안산재)
서원강당에서 보는 동재와 서재
안산영당(사당) 출입문
안산영당
이 영당(당시 안봉사)은 선석사 영각에 있던 이장경의 영정을 1444년 옮긴 곳이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성주이씨 선조 22현의 영정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부가 도난당하는 등으로 현재는 이장경,이조년,이승경,이포,
이원구,이숭원,이직,이제,이사후,이욱등 10현 13점의 영정이 남아 있으며
전하지 않는 이백년,이천년,이만년,이억년,이인기,이인복,이인임,이이민,
이지황,이항,이광적등 12현은 위패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안산서원 앞의 이장경 신도비
이장경 신도비
안산영당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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