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河崙,1348~1416)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이인복 이색의 문인이며,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중국 홍무제가 문책하자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좌의정부사를 역임하고,
1414년(태종 14)에는 영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문충공 하륜(河崙,1348~1416)의 묘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조선시대의 치사제는 대부이상 관료가
나이 70세이 되면 관직에 따라 차등 있게 녹봉을 지급하고 일정한
예우를 했다)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임명되었으며,
왕명으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해 함길도에
갔다가 한성으로 되돌아오던 도중 정평군 관아에서 죽었다.
저서는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 등이 있고, 가사는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태종 때 영의정 하륜의 묘
경상도 진주에서 출생(1348년)한 하륜의 묘는 진주시 마천면 오방리 야산에
조부모, 부모묘와 함께 3대가 한곳에 있으며, 조부와 부모의 묘 4기는 봉분이 장방형이고,
하륜의 묘는 팔각형의 독특한 모양으로,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무덤 외형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무덤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41호이다.
역사의 인물 하륜의 묘역과 오방재를 찾아 진주 오방리로 발길을 향한다.
오방재(梧坊齋)
오방재(梧坊齋)는 진주시 마천면 오방리에 위치해 있는데.
하륜의 조부인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 하시원(河恃源)과 아버지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하윤린(河允麟), 그리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의 묘사(墓祀)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기문(記文)에 의하면 1450년 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창건자는 남명 조식의 생질인 신암 이준민(1524~1591)이다.
처음 창건되고 나서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624년에 중건하고
다시 1704년에 방손(傍孫) 일호(一浩)대에 이르러 중수하고 기문을 적었다.
이 기문에 의하면 방손 일호와 외손 이광태, 장우규 등 친족들이 힘을 합하여
수리하였는데, 그 뒤 퇴락되었던 것을 1930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방재 중수기
현재는 오방재 본 건물과 서행랑, 대문채가 남아 있고 좌측에는
문충공(文忠公) 하륜의 부친인 진양부원군 하윤린의 신도비(1416년 건립)가 있다.
뒤쪽 산 중턱에는 진강부원군 하시원 부부묘역, 진안부원군 하윤린 부부묘역과
진산부원군 하륜의 묘역이 있으며, 오방재는 경남 유형문화재 자료 제435호이다.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신도비각(하륜의 부친)
하윤린(河允麟)의 신도비
1416년(태종 16)에 건립된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이 신도비는 전체 높이 305㎝, 비의 높이 200㎝, 너비 30㎝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이다.
하윤린은 본관이 진주(晋州)로서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의 아버지이다.
비문을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이 신도비는 비대(碑臺)·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춘 형태로, 비신은 검은 오석(烏石)으로,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문에 하윤린은 1321년에 출생하여 식목도감(式目都監) 관료와 문하녹사(門下錄事)를
지내고, 공민왕대에는 환난을 당한 군졸과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방재를 둘러보고 오방재 뒤를 돌아 뒷산에 있는 묘역으로 간다
하륜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 4기가 상하로 있는 묘역
제일 위에 조부 하시원(河恃源)묘 부터 다음 조모 진양 정씨,
부친 하윤린, 모친 진양 강씨 등의 묘가 차례로 각각 상하로 되어있다.
봉분이 장방형인 이 분묘는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무덤 외형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어있다.
제일 상단에 있는 하시원(河恃源)의 묘(하륜 조부)
장방형의 석분
문인석이 서있던 자리
남자들(조부와 부)의 묘에는 문인석이 있었던 자리로 보이는 받침석만 한쌍씩 있는데
아마도 오래전 관리가 소홀 할 당시 누군가가 문인석을 훔쳐가서 비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인들 묘앞의 망주석
부인들(조모와 모)의 묘 앞에는 잘 다듬어진 망주석이 한쌍씩 그대로 서있다
하륜의 묘는 묘역 하단에서 오른쪽으로 5~60m쯤 더 간다
가는길에는 참나무잎이 떨어져 쌓여있어 제법 미끄러워 조심해야한다.
하륜의 묘 ~ 하륜의 묘는 팔각형의 독특한 모양이다.
진주 하씨(晋州河氏)는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진양 하씨(晋陽河氏)라고도 불리며, 시조는
하공진(河拱辰), 하진(河珍)의 두 계파가 있는데, 본래는 같은 뿌리에
연원을 두고 있지만, 고려초기 시조로 볼 수 있는 복야공의 휘(이름)를
상고 할 수 없어 그 후손인 사직공파 하진, 시랑공파 하공진을
각 파조의 시조로 분파하여 불리게 된 것이다.
묘 뒤에서 보는 팔각형 형태
진주하씨는 1451년(조선 문종 2)에 경태보가 편찬되었으며,
이는 국내에서 가장오래된 안동권씨 성화보 보다 25년이 앞서고
1423년(세종 2) 편찬된 문화류씨 영락보에 이어 두번째 오래된
족보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세보서문만
국립중앙전자도서관에 남아 있다.
팔각형의 이음새 부분
이 후 1606년 진양하씨세보를, 숙종 46년 1719년 기해보를 출간했다.
진주하씨는 영남지역에서 학문적 성과를 이룬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사직공파는 고려말 하즙, 하윤원, 하유종 3대에 걸쳐 봉군 작위를 부여받았다.
하즙, 하윤원, 하자종, 하연은 여말선초 4대에 이르러 재상직을 배출하였다.
하륜의 묘 석등과 문인석
또한 하위지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아버지 하담이 문과급제 하고
아들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찬사를 받았으나
단종복위 계획이 탄로나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까지 모두 처형된다.
하륜의 묘 아래에도 1기의 석분이 있는데 부인묘인지 아닌지는 알수가 없다
시랑공파는 하공진 순국 후 300년 동안 그 후손들이 고려조에
공신 대우를 받아 4대 현손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제수받게 된다.
고려조에는 하탁회, 하정재, 하남수,하소를 비롯하여 하소의 아들인
하호, 하부, 하부심 3형제가 문과급제를 하여 양친이 전곡을 하사받았다.
조선초 무관으로서 명성을 떨친 하경복, 하한, 하숙보는 3대에 이어
고위 무관관료를 거쳐 중추원의 재상직에 임명되었다.
600여년 전후가 지난 역사속의 묘역들을 둘러보고 오방재 앞으로 내려온다
조선 태종 대에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데 공헌한 종묘배향공신
영의정 하륜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고려말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목은 이색의 손녀인 한산 이씨(장남 이종덕의 딸)가 하륜의 며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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