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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한국 성씨의 뿌리

광주(廣州)이씨 시조묘 광릉(廣陵)과 우정이야기

by 안천 조각환 2021. 6. 27.

경기도 광주(廣州) 이씨 시조묘인 광릉(廣陵)은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 있다.

광주이씨의 시조묘가 영천에 있게된 사연은 지금부터 65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이씨 시조인 이당(李唐)의 아들 이집(李集)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신돈을 탄핵하려다가 발각되어 신돈이 이집을 죽이려고 체포령을 내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집은 늙은 부친을 모시고 몰래나와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전직 사간을 지낸 친우 최원도(崔元道)가 사는 영천 북안면 도유리 행랑채에 도착한다.

 

광주이씨 시조묘

 

이때 최원도는 마을사람들과 사랑채에서 작은 잔치를 벌리고 있었는데

기별을 들은 최원도는 망하려면 혼자 망하지 어째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드느냐 하고는

노발대발하여 부자(父子)를 쫓아내고, 역적이 앉았던 자리라하여 행랑채를 불태워버렸다.

이집(李集)은 최원도의 뜻을 알아채고 마을밖으로 몸을 숨겨 밤까지 기다렸는데,

밤이 깊어지자 최원도는 사람들의 눈을피해 이집 부자를 데리고 와 다락방에 숨겼다.

낮에는 다락방에 밤에는 골방에 숨어 오랫동안 집안 사람들도 모르게 지내오던 중

"제비(연아)"라는 계집종이 상전의 식사량이 갑자기 많아지게 된것을 이상히 여겨

문틈으로 살펴보니 세사람이 식사하는것을 보고는 자칫하면 나의 실수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겠다고 생각하여 고민끝에 19살의 나이로 자결하고 말았다.

 

묘소입구의 재실(재각)

 

이듬해인 1369년 이집의 부친인 이당이 다락방에서 돌아가셨다.

최원도는 자기 모친인 영천이씨의 묘소 아래 정성껏 장사를 지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광주이씨 시조묘이며 지금도 뒤에는 영천이씨 묘가 있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광주이씨와 영천최씨 두 가문의 후손들은

선대의 각별한 우의를 생각하면서 같은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묘소에 참배하는 풍습이 전해져오고 있다한다.

이곳 광주이씨 시조묘는 왕의 묘가 아님에도 광릉으로 불리게 된것은

무덤이 능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하는데

풍수에 문외한이 봐도 지형지세가 앞뒤좌우 흠잡을데 없이 아늑하고 좋다.

 

묘소입구에 걸려있는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 당선 축하 현수막

 

광주이씨 시조인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國子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는데,

그 아들들 5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크게 출세함으로써 조선조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된 인물이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 이집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였다가 포살령을 받고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피신했으며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재실 전경

 

그후 조선 성종 조에는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

팔극조정이라 함은 극(克)자를 쓰고 있는 광주이씨 문중의 8명이 영의정을 비롯해

각종 판서와 중요 직책을 역임하며 조정의 대소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그럼으로써 광주이씨는 조선 초기 제일가는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근대의 지명인사로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이휘소 박사가 있으며,

이용훈 대법원장, 이수성 전 총리, 이중재 전 의원과 그의 아들 이종구 의원,

이경재 국회의원, 이주영 국회의원 등이 있으며, 이명재 전 검찰총장,

이택순 전 경찰청장도 광주이씨 가문이며, 또 우리나라 여성계의 태두인

이태영 박사를 비롯하여 탤런트 이순재, 야구선수 이승엽도 광주이씨 집안이다.

36세의 나이로 제1야당 대표에 당선 된 이준석은 22세손으로

서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의 고향은 칠곡군 지천면 신동 웃갓마을이다.

 

광주이씨 시조묘역

 

최원도(崔元道)는 고려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상(伯常), 호는 천곡(泉谷)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대 사간(南臺司諫)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좌사간(左司諫)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영천 구룡산(九龍山)

천곡(泉谷)에 은거하여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지켰다.

최원도의 묘소는 일실(逸失:잃어 버리거나 놓침) 되었으며,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도유리(道有里) 나현(蘿峴)에 두 동생인 최형도(崔亨道)·

최정도(崔貞道)와 함께 단소(壇所:제단이 있는 곳)가 마련되어 있다.

           

묘소 입구의 최원도 글

 

둔촌에게 드리다.   증둔촌(贈遁村) 

           

                                 사간 최원도

 

강개하게 시국을 한탄하여 눈물로 옷깃 적셨는데

유리(流離)중에도 지극한 효성은 유음(幽陰)까지 달했노라

한산(漢山)은 멀고멀어 운연(雲煙)만이 아득한데

나현(蘿峴)은 굽이굽이 돌아 초수(草樹)도 그윽 하구나

 

앞뒤의 두 마렵(馬鬣)은 하늘이 가려준 것인데

그 누가 그대와 나 두사람의 마음을 알 것인가

바라건대 대대로 길이 이와 같이하여

모름지기 교정(交情)이 이단금(利斷金)토록 하자구나.

 

앞이 광주이씨 시조묘이고 뒤는 최원도의 모친인 영천이씨 묘이다
광주이씨 시조묘 전면

 

시조묘 앞에서 본 제실과 탁트인 전망
광주이씨 시조묘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석비로 왼쪽은 옛비이고 오른쪽은 새로 세운비다
문인석
측면
최원도의 모친 영천이씨 묘
고려 숙부인 영천이씨지묘(석비)
문인석인데 특이하게도 여성상이다
성현(成俔,1436~1504)의 글

 

당금문벌지성(當今門閥之盛)  광주이씨위최(廣州李氏爲最)

지금 문벌이 번성하기로는 광주이씨가 으뜸이다.  성현(成俔)

 

묘소아래 재실뒤의 큰바위인데 이 돌에는 글자를 새기지 말라는 표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