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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포항 입암서원과 일제당(日躋堂)

by 안천 조각환 2021. 9. 24.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입암서원立巖書院과 일제당(日躋堂),

만활당(萬活堂)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입암서원은 1657년(효종 8)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는데, 1713년(숙종 29) 정사진(鄭四震)을 추가로 배향하고

그 뒤 권극립(權克立)· 정사상(鄭四象)· 손우남(孫宇男) 등을 추가, 5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13년에 강당을, 1974년에 묘우를 복원하였다.

인근에 1605년에 건립된 일제당, 1609년에 설립된 만활당 등이 있다.

입암과 암벽사이의 일제당

 

일제당(日躋堂),은 1600년(선조 33)에 건축되어 여헌 장현광, 수암 정사진, 

윤암 손우남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1629년에는 노계 박인로(朴仁老)선생이

내유하여 입암가 29수와 입암별곡을 남긴곳이기도 하다.

 

*박인로(朴仁老,1561~1642)는조선시대 선전관, 만호, 용양위부호군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영천 출생이며

조홍시가,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영남가, 노계가, 입암별곡, 소유정가, 노계집 등이 있다.

 

일제당 전경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 중에서 부임(赴任)한 것은 보은현감(報恩縣監)과 의성현령(義城縣令)의 외직과

내직(內職)으로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형조참판(刑曹參判), 

의정부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장현광은 사후(死後)에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문집으로 여헌집11권이 있고 속집 5권, 성리설(性理說) 6권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 등의 저서가 있다.

 

바위언덕위의 일제당

 

입암서원앞 은행나무(수령 320여년)와 향나무

 

입암서원 강당건물(눈썹처마) 

 

입암서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下丁 : 세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유물로는 장현광의 영정과 마상도(馬上刀)· 지팡이· 좌장(坐杖) 등이 있다.

입암서원 강당앞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1600년경 심었다고 전해지는

높이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3.5m인 노거수의 향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2004년 태풍으로 고사되었으며 서원밖 언덕에 오래된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서원 강당과 사당사이

 

담장너머로 본 사당건물

 

만활당

 

만활당(萬活堂)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말년에 기거하며 

은숙사(隱宿舍)로 사용하였으며, 1637년 9월에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건물이다.

장현광은 1591년(선조 24) 겨울 어머니 경산이씨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던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금오산(金烏山)으로 피신하여 있었다.

그리고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637년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

선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영천(현 포항)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墓所)는 금오산(金烏山)밑 오산(吳山)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