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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행정동우회 정기총회 겸 문화유적탐방

by 안천 조각환 2021. 11. 11.

대구광역시 행정동우회에서는 2021년 11월 10일 정기총회겸

가을유적탐방행사를 별고을 성주일원의 유적을 둘러보는것으로 진행하였다.

가끔씩 보슬비가 내리는 쌀쌀한 날씨에도 이의익 전대구시장을 비롯한

회원 100여명이 참석하여 버스3대에 나누어 타고 세종대왕자태실과 태실문화관,

선석사를 둘러보고, 성주읍내 삼계탕식당에서 중식겸 총회를 개최한 후

성주역사테마공원과 성산동고분군을 둘러보는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첫 방문지인 세종대왕자태실 입구

 

태실로 오르는 회원들

 

세종대왕자태실에서 안내자의 설명을 듣다

 

조선 4대왕인 세종은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24)사이에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를  성주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 태봉정상에 봉안하게된다.

태봉이 된 이곳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의 지관이 이 자리가 명당임을 왕에게 고하여

이장경의 묘는 대가면 능골로 이장시키고, 이곳에 태실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잠시 담소중인 이의익 전대구시장과 이중근 전동우회장

 

태실문화관

 

태실(생명)공원에 설치한 명종대왕의 태실(모형)

 

선석사 입구

 

낙엽이 지는 늦가을 풍경

 

선석사전경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 1년(69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있었으며 신광사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주지로 부임한 뒤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했는데. 이 어필을 보관했던 어필각이 있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산사 뜰에서 보는 가을풍경

 

절집의 연꽃벽화

 

창 유리에 비치는 석탑

 

중식 겸 총회장소

 

총회에서는 임원선임이 있었다.

 

차기(2022~2023, 2년임기)회장에 김병규님, 수석부회장에 김대묵님을 선임

 

성주역사테마공원의 성주읍성

 

가을축제를 위해 설치중인 소품들

 

쌍도정((雙島亭,연못) 앞에서 설명을 듣고있는 회원들

 

쌍도정은 조선시대 성주관아의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의 이름으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그린 작품

"쌍도정도(雙島亭圖)" 를 토대로 2020년 이곳에 재현하였다고 한다.

 

축제장의 소품들

 

실록각(實錄閣) 전경

 

실록각은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 안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집을 말한다.

실록은 편찬이 완료되면 사고(史庫)에 봉안하는데, 조선 세종 때 중앙의 춘추관과

지방의 성주(星州), 충주(忠州), 전주(全州) 등 세 곳에 사고를 두었었다.

임진왜란 때 성주, 충주사고가 불에 타 소실되고 전주만 남게되자

이후에는 춘추관 외에 정족산(鼎足山), 적상산(赤裳山), 태백산(太白山), 오대산(五臺山)에

사고를 두고 부근의 전등사(傳燈寺), 안국사(安國寺), 각화사(覺華寺), 월정사(月精寺)를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지정하여 주지(住持)를 총섭(總攝)에 임명하고 지키게 했다.

성주군에서는 세종 때 성주에 있었던 실록각을 재현한것이다.

 

성주이씨 시비공원

 

이 시비공원 옆에는 성주이씨 시조인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이

살았던 옛 집터이고, 그 자리에는 봉산재가 들어서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성산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조(840~856)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으로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는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인 이곳으로 옮겨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충령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이 되자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청사 도서관

 

청사(靑史) 서석준(徐錫俊, 1938~1983)경제기획원 차관,

상공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1983년 잠시 미국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센터에 가 있다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발탁되어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부총리가 됐다.

취임한 지 3개월 만인 1983년 10월, 당시의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여

17박 18일간의 서남아시아 태평양 6개국 순방길에 나섰다가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시내 아웅산묘소에서 북한의 공작원이 장치한

폭탄테러 사건으로 사망했다.

 

청사 도서관 앞의 청사 서석준 흉상

 

서석준은 성주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하였으며, 1964년부터 2년간

AID장학금을 받아 미국밴드필터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해인 1959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1962년 3월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관료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성주읍성 북문

 

별고을 상징물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전경

 

성산동 고분군

 

성산동 고분군은 5~6세기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으로 총 129기가 있다.

 

발굴조사중인 고분

 

전시관 입구

 

전시관을 둘러보며 설명을 듣고있는 회원들

 

고분군 방문 기념촬영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버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