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환은 우리나라에 거주하지 않고 실제로는 미국에 살고있다.
그러면서도 선조들의 유산이 거의 잊혀지거나 멸실되어 가고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오직 고향에 남겨둔 고택을 보존하기 위해 수년째 양국을
오가면서 많은 시간과 비용은 물론 때로는 혼자 숙식까지 해결하며 머물러야 하는
어려운 여건을 감수하면서도 고택을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케 하는데 헌신했다.
조상환(曺祥煥)
조상환(曺祥煥)은 찬성공 조경수(曺敬修)의 18세(대)손이요,
김천 입향조이신 참의공(參議公) 조심(曺深) 선조의 17세(대)손이 된다.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의 15세(대)손이요,
우졸당(愚拙堂) 조유(曺逾)의 맏아드님이신 지사공(知事公) 조세호(曺世虎)의
9대손으로 부(父) 조병훈(曺秉薰)과 모(母) 서산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정숙(亭淑)과 정애(貞愛) 두분의 누님이,
아래로는 정화(貞和) 정희(正熙)의 두 누이가 있다.
※참고로 세(世)와 대(代)에 있어서는 상대하세(上代下世). 기불대수(己不代數).
대불급신(代不及身)이라는 원칙 등으로 2세=1대 라는 인식과
또 세(世)와 대(代)는 같은 뜻으로 보는 "동의론" 과의 이론이 있었는바
2010년 성균관에서 심층 논의 결과, 이의 다툼은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세(世)와 대(代)를 같은 의미로 쓰기로 하였다고 한다.
김천 나화랑(본명 조광환) 생가, 현 조상환 고택
김천 나화랑 생가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건축된 고가로,
안채, 사랑채, 창고 등 3개동과 대문채가 따로 있다.
조광환(가수 나화랑)이 태어나고 자란곳인데 가족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게 되자,
조상환의 조부이신 조홍승씨가 타성에게는 줄수 없다하여 인수하게 된것이다.
가수 나화랑(본명 조광환,曺曠煥,1921∼1983)과 조상환은 지사공 휘(諱) 세호(世虎)의
현손(玄孫, 4대손)인 휘(諱) 한규(翰奎)의 래손(來孫, 5대손)이다.
즉 지사공의 9대손으로 맏형인 작사가 조경환(曺景煥, 예명 고려성, 1919~1956)이
휘(諱) 한규(翰奎)의 주손(主孫)이며,
따라서 친동생인 가수 조광환(예명 나화랑)과 조상환은 10촌(村)간이 되고
조상환의 조부 홍승(洪承)씨와 조광환의 조부 우승(祐承)씨는 6촌(재종) 사이이다.
나화랑 생가의 안채
이 후 젊은 후손들은 사정상 객지로 떠나가고 조상환의 어머니가 줄곧 지켜오다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은 비어있게 되고 관리도 소홀하게 되면서
고택은 급속히 노후화되어 폐가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이를 허물고 포도밭 등으로 전용하자고 여러번 권유를 했었지만,
고심끝에 고택을 보존하는 것이 자손된 도리라고 생각을 굳히고, 이를위해
관계자들과 수차례 접촉을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6여년만의 각고 끝에
지난 2020년 3월 20일 문화재청에서 국가 등록문화재 제775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가수 나화랑(조광환)과 작사자 고려성(본명 조경환)이 태어나고 자란 방
조상환(曺祥煥)의 고택이 국가등록문화재 "김천 나화랑 생가"로 지정된 사유는
"광복 후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인 나화랑(본명 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과거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동시대 활동했던 음악가의 생가가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현존하는 생가라는 점과 음악사적 지역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있다.
나화랑(1921~1983)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 등
생애 500여편의 가요를 남기고 수많은 음반을 양산하여
한국 대중가요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다" 라고 밝히고 있다.
사랑채
또한 동시대 음악가 중 월북자나 친일 인사 등을 제외한 32명을 가려
그중 나화랑 업적에 견줄 만한 사람으로 고복수, 이난영, 현인, 김교성, 김부해,
김서정, 김화영, 손석우, 왕평, 이시우, 조춘영, 형석기 등 12명을 선정하였으나
활동했던 음악가의 생가가 대부분 사라진 상황이라 현존하는 생가가 지닌
희소성, 상징성과 음악사적, 지역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국가등록문화재로 선정되었다.
사랑채 대청
한편 등록문화재로 지정 당시 조사자 의견을 살펴보면
-전략-
안채와 사랑채 및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 가옥의 건축시기는 불확실한 데,
사랑채의 경우 종도리 밑면에 쓰여있는 상량문인 상원58년 신유년
(上元五十八年 辛酉年)과 건축형식을 보면 1921년으로 여겨진다.
안채는 그보다 조금 앞서는듯 하지만 정확한 년대는 알 수 없다.
1921년 본 가옥에서 출생한 나화랑은 1983년 향년 62세로 타계하였고,
작곡생활 40여년간 480여곡을 작곡하였다.
2009년 김천 직지문화공원에 고려성 나화랑 형제의 노래비를 세웠고,
2013년에는 나화랑의 흉상을 제작하여 건립하였다. 라고 하였다.
대문채(봉산면 인의리 722)
올해(2022년) 설계를 거쳐 앞으로 복원이 완료되어 고택의 옛 모습을 찾게되면
인근의 매계 구거(舊居)인 율수재와 더불어 창녕조문(昌寧曺門)의 명소가 될것이 분명하다.
이는 조상환(曺祥煥)씨와 같이 선조들의 뜻과 유산을 존중함과 아울러
보살피고자 하는 정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직지문화공원의 고려성(본명 : 조경환) 나화랑(본명 : 조광환) 형제노래비
더구나 김천 창녕조문은 조선시대에 한때의 수난으로 거의
모든것을 멸실 당한데다 6.25의 격전지로 또 한번 많은 것을 잃음으로써
이를 보살피고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
앞으로도 이와같이 숭조정신의 뜻있는 사업들과 더 나아가서
옛것들을 발굴하며 복원하는 일들이 점점 많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고려성 나화랑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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