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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우졸당 조유(曺逾) 선생의 묘비를 세우다

by 안천 조각환 2022. 9. 8.

 

 

조유(曺逾) 선생의  자(字)는 자고(子高)이며 호는 우졸당(愚拙堂) 이다.

1649년(을축) 봉계 매계 구거에서 매계 조위(曺偉) 선생의 5대손으로 태어나서

1696년 에 돌아가셨으며, 묘는 선돌 참의공 묘 좌측(청룡 외을좌)에 모셔져있다.

특증(特贈)에 지평(持平)이며, 추증(追贈)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이시다.

부인(配)은 선산김씨로 정부인(貞夫人)이며, 묘는 봉계 율수재 좌측에 모셔졌다.

 

우졸당 조유선생 묘소와 묘비

 

지난 2021년 3월에 김천향토사 연구회에서는 우졸당 조유(曺逾)선생의  

한자로된 유고(遺稿)집을 국역본으로 발간한바 있으며,

이번 2022년 여름에는 율수재 옆의 정부인(貞夫人) 선산김씨 묘소를 이장하여

선돌(외입석)의 우졸당(愚拙堂) 묘소와  326년만에 합폄(合窆)하여 모시고,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선생이 찬(撰)했던 우졸당의 묘갈명을

다소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후 오석에 음각하여 묘비를 세웠다.

 

우졸당 묘소 전경

 

우졸당(愚拙堂) 세계도(世系圖)  약보(略譜)

 始祖 繼龍 ― ② 應神 ― ③ 壽享 ― ④  ― ⑤  ― ⑥  ― ⑦  

 延祐 ―   漢知 ― ⑩ 之賢 ― ⑪ 思詮 ― ⑫ 正鱗 ― ⑬ 仲龍 ― ⑭ 義文 

 自奇 ― ⑯ 允恭 ― ⑰  ― ⑱  ― ⑲ 挻文 ― ⑳   (21) 松茂

 

更起 ①世 松茂― ② 俊― ③ 人取― ④ 元桂― ⑤ 遇禧 ― 

⑥ 敬修(左贊成,찬성공파 파조) ― ⑦ 深(參議公,김천 입향조) ― ⑧ 繼文(蔚珍公)― ⑨ (文莊公)

― ⑩ 士虞(別堤公―  胤禧(寧越公) ⑫ 瀷(黙齊公) ― ⑬ 悌昌(參判公) ― ⑭ 逾(愚拙堂)

―  ⑮ 세호(世虎,지사공),世龍(인재공),세봉(世鳳,삼석재),세붕(世鵬,시직공)

⑯ ○(외자) ― ⑰ 文 ○  ― 18) ○明  ― 19) ○奎  ― 20)鎭○  ―  21) 錫○ ― 22) ○承

― 23) 秉○ ―  24) ○煥  ― 25) 圭○,喜 ○, 基 ○ ― 26) ○ 鉉, ○ 鎬,○ 鍾― 27) 永○, 海 ○,洙 ○

 

*우졸당 조유선생은 찬성공의 8대손이요, 매계선생의 5대손으로

환자 항렬(行列)은 10대조가 되신다.

슬하에는 지사공(세호), 인재공(세룡), 삼석재(세봉),시직공(세붕) 등

가문의 기둥과도 같은 훌륭한 네 아들분을 두셨다.

 

봉분 너머로 보이는 극락산

 

묘소 앞으로는 산너머 황악산이 보인다

 

우졸당 묘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창녕조공 휘 유 지묘(昌寧曺公 諱逾之墓)

배증 정부인 선산김씨 지묘 부좌(配贈 貞夫人 善山金氏 之墓 拊左)

 

묘비 왼쪽에서 비문 순서대로

 

우졸당 휘 유 묘갈명(遇拙堂 諱 逾 墓碣銘) 원문

 

先師 寒水齋先生이 愚拙堂 曺公의 간독(簡牘)뒤에 쓰기를 “公의 고고한 操行과 독실한 공부는

사람마다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하였으니, 자연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고루하여 한 번도 여택(麗澤-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강론하고 수양을 힘쓰는 것)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유감스런 일이다. 내가 일찍이 先師의 이 글을 읽고 나서 공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大君子(여기는 한수재 선생을 이름)推重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그 행장을 보니,

공은 진정 숨은 선비요 독실한 학문으로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은 분이다.

公의 諱는 逾, 字는 子高이다. 遠祖 諱 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駙馬로 창성군에 봉해져 창녕의 大姓을 이루었고,

몇 대를 지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平章事가 8대나 배출 되었고, 諱 偉는 세칭 매계 선생인데

문학으로 성종의 知遇를 받았다가, 燕山主 때 혹심한 史禍를 만났으니, 곧 公의 5대조이다.

高祖 諱 士虞는 가문에서 겪은 禍難을 마음 아프게 여기어 여러 번 벼슬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曾祖 諱 胤禧는 벼슬이 寺正에 이르고 祖父 諱 瀷은 自號 黙齋로 병자호란 이후로는 집안에 들어앉아 뜻을 지켰고,

祖母 申氏는 大司成 敏一의 따님이요, 牛溪 成선생의 外曾孫으로 어려서부터 특이한 行이 있었으므로

우암(尤庵)선생(송시열)이 申氏의 외조부 滄浪공의 墓文에 특서하였고, 父親 揮 悌昌은 일찍 작고하고

모친 宋氏는 진(日+進)의 따님으로 인조 27년(1649)에 金山 봉계리에서 公을 낳았으니,

이곳은 곧 매계의 옛 집터이다. 공은 천성이 자상, 端雅하여 어려서부터 自然 道에 가까웠고,

여러 아이들과 잡된 놀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4-5세 때에 화상을 입어 그 모양이 매우 흉측스럽게 생긴

아이를 만났는데 대뜸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았다. 옆에서 그 까닭을 묻자,  “저 아이가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보고 싶지 않다.” 고 대답하므로 듣는 이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공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문자를 알았고 8세에 입학하여 능히 글의 大義를 통하였다.

15세에는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그 거리가 멀었으므로 밤을 불구하고 분상(奔喪)하여

어른과 다름없이 집상(執喪)하였다. 弱冠이 되어 이미 爲己之學에 전념, 經, 史와 송나라 현인들의 글을

모조리 강독하여 정밀히 推究하고 반드시 실천하기를 힘쓰되, 첫닭이 울면 일어나

맨 먼저 家廟를 찾아 참배하고 이어 모친에게 인사를 드린 다음 글을 읽기 시작하여

밤이 깊어야 취침하였고, 또 “배우기 전에는 배우기를 생각하고 배운 뒤에는 지키기를 생각해야 한다.

차라리 道를 알고 나서 죽을지언정 배우지 못한 채 살지는 않겠다.”는 등의 自敬文을 지어 책려하였다.

또한 일찍이 “大學의 修身, 治國의 要法에는 모든 의리가 모두 갖춰져 있으니, 꿇어앉아 대학을

다시 읽기시작, 16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였는데, 그 회수는 일만여 번을 넘은지가 여러 차례였다.

이제야 나의 의지와 趣向이 각별해진 것을 알겠다. 이전에 읽었던 것은 참으로 신을 신은 채

가려운 곳을 긁은 격이었다.” 고 말하였으며, 누가 혹 의의(疑義)를 물으면 묻는 데로 명백히 답하여

듣는 자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였다. 公의 학문은 一身을 근본으로 삼아서 儀容은 반드시 공손하고,

언사는 반드시 자상하였으며, 衣冠은 반드시 단정히 하고, 起居는 반드시 조심히 하였으며,

마음가짐에는 담허(淡虛)하여 외부의 물욕에 집착되지 않고, 일 처리에는 공신(公愼)하여

사사로운 뜻이 게재되지 않았으며, 어버이 섬기는 데는 그 기색이 和氣스러웠고,

제사 받드는 데는 그 敬이 생시를 뵈듯 하였으며 집안은 엄격과 관용으로 다스리고,

사람은 정성과 진실로 대하였으며, 공부 과정에 있어서는 날마다 근면하여 잠시도 間斷이 없었다.

하루는 기력이 피로하여 늦게 일어나게 되자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한 것이 내가 세운 뜻이건만,

한번 잠들었다가 깨었을 땐 날이 이미 밝았으니, 아는 겨울밤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나의 뜻이 서지 못해서인지“ 하는 일기를 써서 스스로를 책려(策勵)하였으며

그 학문의 편모(片貌)를 엿볼 수 있다. 숙종 11년(1689)에 모친의 상을 만나 삼일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3개월 동안 죽만 먹었고, 3년 동안 나물밥에 물을 마셨으며, 상복을 벗지 않은 채

밤낮으로 빈소를 지켰고, 침실에 들지 않았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반드시 묘를 찾아가 죽기로써 애통해 하였으니, 옛날 少連과 大連 형제의 執喪도

이에서 더 할 수 없었다. 외동 아우에게 일과를 시키는 데는 친절히 誨誘하여 한 번도 질책을

가한 적이 없었고, 애애한 우애가 나중에 이르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일찍이 遇拙堂이라 自號하여 서실에 걸고 銘을 지어 그 밑에 붙였다가 다시 ”才學이 모두 拙한 것이

이 遇의 실상이니 어릴 때의 마음을 보존해야 당초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 하는 銘으로 고쳐

학문에 정진하는 뜻을 서술하였는데, 이윽고 ”이는 남에게 알리는 결과가 될까 염려이다“ 면서 아예 때어 버렸다.

동 21년(1695)에 道伯이 公의 學行을 들어 朝廷에 상신하여 別檢으로 擬望되자 공이 듣고

”나는 학행에 대한 실제가 없고 학행에 대한 虛名만 있게 되었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하였다.

드디어 이듬해 4월 11일에 48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아! 공의 孝友에 대한 行과 학문에 대한 노력을

사람마다 미치기 어려운 바가 이와 같았으니, 당시에 大君子(여기서는 寒水齋를 이름)의

嘆賞(크게 탄복하여 칭찬하는 것)을 받았음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榮達을 구하지 않고

山林에 묻혀 조금의 원망도 걱정도 없었으니, 어찌 만나기 쉬운 인물이겠는가? 영조 11년(1735)에

연신(筵臣-經筵을 관계하는 관원)의 주청으로 司憲府 持平에 追贈되었다.

夫人 善山金氏는 護軍 진수(震燧)의 따님이요, 承旨公의 玄孫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식견과

도량이 있었고, 공에게 온 뒤에는 媤母를 조심으로 섬기고 조상을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공은 늘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뿐 살림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부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담당하여

집안일로써 공의 누가 되지 않도록 하였고, 공이 별세한 뒤에는 네 아들이 어리어 가문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과부의 자식으로써 명성이 없는 자와는 서로 사귀지 말라”는 고인의 말을 들어

여러 아들들을 경계하는 한편 으레 공의 의지와 사적을 곁들여 격려하곤 하였으며,

큰 흉년이 들었을 적에는 유기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길렀다가 그 아이가 장성한 뒤에 常漢의

자식이 아님을 알고는 그 文券을 소각시키고 보내 주었으니, 이는 다 여느 부인의 미칠 바가 아니다.

참으로 女中士行(여자로써 선비의 행이 있다는 뜻)이라 이를 만하다.

드디어 영조9년(1733) 정월 4일에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아들은 世虎, 世龍, 世鳳, 世鵬인데 世鵬은 進仕이고, 딸은 蔡昌徵에게 출가하였다.

이어 목(霂), 운(澐), 회(雨+淮)와 김처선의 처는 世虎의 소생이고, 방(水+䨦), 택(雨+澤)과

김식의 처는 世龍의 소생이고, 협, 부와 박동권의 처는 世鳳의 소생이고, 임은 世鵬의 소생이며,

命千, 命洪, 命五(우졸당 행장에는 命武로 되어있음)와 서광한의 처는 채창징의 소생이다.

공의 네 아들과 여덟 손자가 한 집에 지내면서 학문을 강론, 어버이를 봉양하고

和氣 또한 융융(融融)하므로 향리에서 그 효우를 찬양하는가 하면,

世龍, 世鵬은 先正(한수재를 이름)의 門下에 수업하여 모두 사림의 推重이 되었는데

世龍은 지극한 효행으로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마침내 죽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평소

진실한 愛와 敬이 일신에 축적되어 가정을 교화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공의 아우 述 또한 志와 行이

고매(高邁)하여 戊申變亂(영조 4년에 있었던 이인좌(李獜佐의 반란을 이름)때에 갈팡질팡하는

守令을 의리로써 설득시켜 적의 길을 가로막게 하였으니, 이 역시 공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공을 알려고 하는 이는 여기에 증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孔子의 經과 曾子의 傳으로 된 大學을 德에 나아가는 門戶이므로 공은 대학을 배우지 않으면

학문하는 길이 어둡다 말하고, 16년 동안 줄곧 읽어 수만 번이나 돌파하여,

가슴속에 한 책의 대학이 영롱(玲瓏)하게 투철되어 있으니, 어찌 송나라 윤돈(尹焞)이

대학을 자기의 말처럼 외웠던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고고한 操行은 효우로써 그 근원을 삼아

아내가 和樂하고 형제가 본받았으니, 가정의 교화를 본다면 공의 학문을 인정 할 수 있네.

일신의 할 일은 다했건만 수명이 짧은 데야 어찌할꼬. 先師가 글로 特書해 탄복하였으니,

그 실체가 없었다면 어찌 이 推仰 받을 수 있을 손가? 내가 이 비문 맡게 되었으니

나의 이 글 조금도 무색하지 않누나.

崇禎紀元 以後 영조 21년(1745)에 파평 윤봉구(坡平 尹鳳九)가 撰하다.

 

참고로 윤봉구(尹鳳九,1683~1767))선생은  조선후기 군자감정,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