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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안동 선어대와 향교, 우탁선생의 역동서원

by 안천 조각환 2022. 8. 4.

안동의 동쪽 임하댐 아래 반변천이 흐르는 곳에는 마씨성을 가진 노총각과

인어선녀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선어대가 있고, 바로 인근에는 유서깊은 안동향교,

그리고 안동대학교 안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발의로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역동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선어대(仙漁臺)

 

선어대 안내판에 따르면 옛날 마(馬)씨 성을 가진 가난한 노총각과

언덕아래 소(沼)에 사는 인어소녀의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어느날 총각이 가난을 한탄하여 이 언덕에서 뛰어내려 죽으려하자 인어소녀가 나타나

총각의 사연을 듣고 내 소원을 들어주면 부자가 되게 해주겠노라고 하였다.

 

반변천 생태공원

 

소원인즉 인어소녀가 용이되어 하늘로 오르려고 하는데, 상류에 있는 임하 소(沼)의 용이

인어소녀가 용이되어 승천하려 할때마다 번번히 방해를 하여 못오르고 있으니

그 용과 맞붙어 싸울 때 큰소리로 "야 이놈아!" 라고 한번만 소리 질러주면

임하소(沼)의 용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한눈을 파는 순간 인어소녀는 승천 할수 있으니,

그렇게만 해주면 부자가 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런일이 있은 후 소녀는 승천하였고, 총각은  평생 소원이었던

많은 토지를 얻어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전설로 마씨의 들에서 온 것이라는 마뜰이라는 지명과, 

인어가 사람으로 변해 올라왔다는 선어대(仙漁臺),

그리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의 용상동(龍上洞)의 지명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떨어진 배롱나무꽃이 영산홍 꽃인양...

 

선어대 옆의 송제 비각

 

송재(松隄)비와 송제사적비

 

송제(松堤)라는 말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위해 소나무를 심은 제방을 뜻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홍수의 피해가 컸던 곳으로 치수(治水)를 한 2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1605년에 부사 김륵(金玏)이 제방을 쌓은 후 세운 송제(松隄) 비(碑) 이며,

다른 하나는 1778년 부사 김상묵이 18만여명의 일꾼으로 몇달만에 제방쌓기를

완료했다는 내용으로, 그 3년 뒤인 1780년 9월에 세웠다고 기록한 사적비이다.

 

 

안동향교의 정문이며 누각인 청아루(菁莪樓)

 

안동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하였으며, 1567년(명종 22) 안동 명륜동에

중건(重建)하였는데 그 규모가 성균관(成均館)과 동일하여 영남지방에서 가장 컸었디.

그러나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으며, 1986년 지금의 송천동에 다시 중건하였다.

 

명륜당과 동재(문이 잠겨있어 담 너머로 본 풍경)

 

현존하는 건물은 1곽 6동으로 정전(正殿)인 대성전과 명륜당,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청아루(菁莪樓)와 부엌을 뜻하는 주사(廚舍)로 구성되어 있다.

 

서재

 

안동향교 전경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대학교 구내)

 

약동서원 전경

 

역동서원은 1570년(선조3)에 퇴계(退溪) 선생의 발의로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안동지방 최초로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했다.

1684년(숙종10)에 역동(易東)이라는 사액이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이건 복원하였는데, 1991년 안동대학교가 들어서면서 학교 구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손수 써서 걸었던 "역동서원’, "광명실" 등 현판들이 남아있다.

 

 

역동서원 정문인 입도문(入道門)

 

역동서원 강당과 동.서재

 

역동(易東) 우탁(禹倬,1262~1342)선생은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향공진사로 뽑혔으며, 1290년 충열왕 16년 29세에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 지금의 영덕 영해)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곳에 요망스러운 귀신이 있어서 성대한 제사를 지내곤 하였는데,

부임하자마자 그 신사(神祠)를 불태워 버리며 미신을 타파하는 강직함이 있었다.

 

역동서원 강당

 

1308년 8월 충선왕이 즉위하고 곧 부왕인 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

범간하는 패륜을 저지르자 1308년 10월 24일 흰 옷을 입고 도끼와 거적때기를 들고가

왕에게 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임금의 잘못된 과오를 직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며,

특히 이러한 행동은 가져간 도끼로 맞아 죽어 거적때기에 싸이겠다는 각오의 징표이다.

결국 우탁은 파직당하고 낙향하게되며, 낙향 길에 탄로가를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교당(明敎堂)

 

동재인 사물재(四勿齋)

서재인 삼성재(三省齋)

 

상현사(尙賢祠,우탁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우탁선생의 시 "잔월(殘月)"


푸른 저 하늘 저 멀리에 낫을 걸어 놓았는가?

푸른 산 높은 절벽에 빗을 달아 놓았는가?

활 시위를 당겼는가?

산새들은 두려워하고 낚시바늘 굽었는가?”

 

사당앞의 비비추

 

우탁 선생 시조비 (역동서원 입구)

 

탄로가(嘆老歌)          

 

봄의 산에 눈녹인 바람, 잠깐 불고 간 곳이 없다.

잠시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 잡고

늙는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은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白髮)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관리동

 

월영교

 

갑자기 소낙비 내리는 월영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