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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정감록의 십승지를 찾아서~2)십승지중 으뜸인 풍기 금계촌

by 안천 조각환 2022. 8. 4.

십승지 (十勝地)는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지명을 말하며, 십승지지라고도 한다.  

십승지는 여러설이 있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1)풍기의 금계촌(金鷄村),

2)안동의 화곡(華谷, 현 봉화 춘양면), 3)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甑項) 근처(현 상주 우복동),  

4)남원 운봉의 지리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5)예천의 금당동(金堂洞, 금당실 마을), 

6)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7)영월의 정동상류(正東上流), 8)무주의 무풍동(茂豊洞,

9)부안의 변산(邊山) 호암마을, 10)성주 기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등이다.

 

풍기 금계촌의 금선정이 있는 마을

 

십승지의 입지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은 십승지 중 으뜸이며 금계 황진량의 금선정과 금양정사가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소백산 자락의 풍기 금계촌(錦溪村)을 찾아 나선다.

 

금계계곡

 

금선정이 있는 이곳은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계곡을 흘러내려

한바탕 휘돌아 소를 이루는 곳으로, 옛 사람들이 "소백 제1경:이라 부르며 아끼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금계 황준량(1517~1563)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금계가 자주 찾아

풍광을 감상하고 찬탄(讚歎)하곤 했던 곳이다.

 

풍기 금선대(錦仙臺)와 금선정(錦仙亭)

 

금선정은 금계계곡의 금선대 바위위에 세워져 있는데,

1550년경 금계 황준량이 이곳을 금선대(錦仙臺)라 이름 지었다고 하며, 

200여 년 후인 1756년(영조 32) 풍기군수이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면에

금선대(錦仙臺)라고 삼대자(三大字)를 암벽에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5년 후인 1781년(정조 5)에 황준량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며

금선대에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錦仙亭)이라 이름하였다.

당시의 정자는 허물어지고 1989년 후손들이 영풍군의 지원으로 중수하였다.

 

금선정 입구와 안내판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軍御史), 지평을 거쳐 신녕현감, 단양군수를 지냈다.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재임 중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 후 돌아오는 도중 졸하였다.

풍기의 욱양서원,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송림으로 우거진 금계계곡과 금선정 비경

 

금선정

 

금선정에 걸려있는 여러개의 편액들 중 퇴계 이황선생시 

 

금선정 앞 바위에 새겨진 황준량의 시(詩) 유금선대 (遊錦仙臺)

승지 찾는 마음에 골짜기 창문에 드니,

시재를 어찌 꼭 반강에 빌리랴.
무지개 밝은 폭포에는 해맑은 눈이 날리고,

비단을 깐 안개 속 꽃이 돌다리를 비추네.


소백산 구름 노을 어느 곳이 제일일까,

금선대 달과 바람 짝할 때가 없으리.
봄옷 지어 걸치고 꽃을 찾아 떠나서,

솔 그늘에 기대어 술동이를 기울이네.


글은 황준량의 16대손 황재국(강원대 명예교수)이 썻다.

 

이 편액은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풍기군수 재직 시 아름다운 금선대를 읊은 시다.


옛 마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는 않으나  /  舊洞非難辨 (구동비난변) 
 뭇 봉우리가 숨어있음을 새삼 깨달았네.  /  羣峰更覺幽(군봉갱각유)
신령스런 돌들은 울리는 듯하지만  /  石靈如欲響 (석령여욕향) 
 고요한 연못은 흐르는 듯 마는 듯.  /  潭定不爲流 (담정不위류)


 부끄럼 없이 금선대는 基川을 지키고  /  無愧基川守 (무괴기천수)
늠름하게 갑오년의 가을 알리고 있네.  /  堪傳甲午秋 (감전갑오추) 
내 오히려 세상에 여한이 있지만  /  吾猶有餘恨 (오유유여한) 
금선대에서 노니는 늙은이가 되려네.  /  差却錦翁遊 (차각금옹유) 

금선정에서 보는 금계계곡(상류)

 

금선정에서 보는 금계계곡(하류)

 

1756년(영조 32) 풍기군수이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면에 새겼다는 금선대(錦仙臺)

 

금선대 암벽위의 금선정

 

금선정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계곡 아래에서 바라보는 금선정

 

금선정과 금계계곡

 

암벽위의 금선정

 

뒤에서 보는 금선정과 송림

 

금계촌마을의 상사화(난초)

 

금계 황준량의 추모비와 계양정

 

금계 황준량선생 추모비

 

능소화 곱게핀 산길을 따라 마을 뒤편 금양정사(錦陽精舍)로 향한다

 

구불구불 산길을 힘겹게 돌고돌아 금양정사에 오른다

 

풍기 금양정사(錦陽精舍)

 

금양정사(錦陽精舍)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서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을 하려했던 곳으로 생전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양정사

 

금양정사의 창건은 1563년 어느 봄날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정사가 세워지기 전에는 초막 띠집의 성천암(聖泉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금양정사 벽면에 걸린 금계정사완문 편액에는 금계 황준량(1517-1563)이

정사를 세우려 했던 일과 후에 짓게 된 경위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정사가 다 지어지기 전에 황준량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사후에 승려 행사(行思)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정사의 건물을 완성하고 관리도 했다고 한다.

 

금양정사는 병자호란(1636) 때 화재로 소실되어 60여 년 뒤인

1701년(숙종 27) 금계 사손 성(垶, 금계의 7세손)이 풍기군수 홍경렴(洪景濂)에게

중수의 뜻을 밝혔으며, 군수가 그 자리에 가서 보고 산수가 아름다우니 실로 덕 있는 이가

거처할 만한 자리여서 금계라는 지명이 과연 헛되지 않음을 실감하고 중수하게 되었다.

 

대문안의 안채

 

금양정사(錦陽精舍)


돌구멍에서 몽천이 솟아나오고  /  石竇蒙泉出(석두몽천출)
산에는 비단 빛 나무 펼쳐졌네  /  孱顔錦樹開(잔안금수개)
가을바람에 고향 산천 흥겨워  /  秋風故山興(추풍고산흥)
강선대에서 흠뻑 취하였네  /  一醉絳仙臺(일취강선대)

 

퇴계 이황선생(왼쪽)과 금계 황준량선생(오른쪽)의  단소

 

단소에서 보는 금양정사

 

금양정사의 샘 성천(聖泉)

 

이 성천(聖泉)은 바위틈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구치는데,

고려 초 왕건이 남행(936년) 시 풍기(등항성)에 왔을 때 이 성수를 마셨다는 전설과

또 풍기 관아 아전이 이 물을 길러다 군수에게 바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