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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대산 이상정선생의 안동 고산서원(高山書院)

by 안천 조각환 2022. 9. 1.

고산서원은 조선후기 유학자인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1711∼1781)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 대산서당이 있던 자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서원 앞으로는 암벽벼랑에 천연기념물 제252호 구리 측백나무숲이 바로 보이고

그 아래로는 의성과 안동 일대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미천이 휘감아 흐른다.

미천(眉川)은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마치 눈썹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동 고산서원(高山書院)

 

고산서원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추었으며. 특히 동재인 면언재(앙지재)와

서재인 백승각의 양 끝은 개방된 마루를 두어 주변 경관을 음미하도록 꾸며져 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는 앞의 누각만 허물고 다른 건물은 보존되었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

동재를 중수했으며, 다만 아직까지 문루인 누각이 복원되지 않고 있는것이 몹시 아쉽다.

안동 남후면 암산앞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

 

무릇꽃이 곱게 피어있는 고산서원 입구

 

대산 이상정선생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목은 이색(1328-1398년)의 14대손으로 1717년(숙종37년) 안동 일직현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외조부인 밀암 이재로부터 사사받으며 퇴계학문을 소개받게 된다.

그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게 된다.

 

*율려(律呂)란 국악에서 음악이나 음성의 가락을 이르는 말로

율(律)의 음과 여(呂)의 음이라는 뜻인데, 육률(六律)과 육려(六呂)를 아울러 이른다

 

서원 정문인 향도문(嚮道門,중앙)

 

선생은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선생의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273인이나 된다.

 

종손 이방수(李芳洙)님의 안내로 서원으로 입장 

 

문집은 52권 27책이 있는데, 권1~3에는 시, 권4에는 소, 권5~38에는 서, 권39~42에는 잡저,

권43에는 서, 권44에는 서·기·발, 권45에는 발, 권46에는 잠·명·찬·상량문 등,

권47에는 비문·묘지명, 권48에는 묘갈명, 권49~52에는 행장 등이 실려 있다.

그외에도 이기휘편, 제양록, 퇴계서절요, 사례상변통고, 병명발휘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1781년(정조 5)에 7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고, 1789년에는 고산서원이 세워졌으며,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1910년 문경공(文敬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인 광정(光靖)과 남한조(南漢朝,1744~1809)를 통하여 

유치명(柳致明. 1777~1861)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진상(李震相,1818~1886)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한말에는 곽종석(郭鍾錫,1846~1919)에 계승되었다.

 

 

고산서원 강당인 호인당(好仁堂)

 

한산 이씨의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고려 숙종 때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6세손 이곡(李穀)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하고,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은 이곡의 아들이며, 1353년(공민왕 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이르렀고, 1391년(공양왕 3년)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95, 상신 4, 대제학 2, 청백리 5, 공신 12명을 배출하였다.

 

종손으로부터 대산선생과 서원에 얽힌 상세한 설명을 듣다(동영상)

 

대산 이상정의 후손은 이완(22세·홍문관 교리), 이병운(23세·현감),

이수응(24세·증 이조참판), 이돈우(25세·이조참판) 등이 있으며,

그의 일직면 대산종택은 이방수(李芳洙,문양공파 30세) 9대종손이 지키고 있다.

 

"고산서원" 편액은 동원 김희수(東園 金羲壽)의  글씨이다 

 

규모가 큰 강학당(호인당) 마루

공자(工)자 형태로 지어졌다는 동재 건물

동재(東齋)인 면언재(俛焉齋)와 마루의 청림헌(淸臨軒) 편액

 

서원의 동재와 서재는 평소 유생들의 공부와 숙식장소로 쓰이나

이곳 고산서원의  동재인 면언재는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서재인 백승각은 주로 유물을 보관하는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서재(西齋) 건물(위), 백승각(百承閣)과 마루의 지지당(止止堂) 편액

 

사당(묘우) 출입문인 내삼문(신문,神門)

 

대산 이상정 선생은 "옥류암기(玉溜庵記)에서 봉화 봉성면 두곡마을에 있는

홍우정의 종가인 옥류암을 찾아 다음과 같이 찬하였다.

 

유독 바위 틈서리의 졸졸거리는 샘물을 사랑하여

그 옆에 집을 짓고 그 샘 이름으로 현판을 걸었으니,

어떻게 그처럼 겸손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 한줄기 샘물이 흘러서 바다를 이루거니와,

드넓은 강물도 산꼭대기의 도랑물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봉화 옥류암은 "옥 같은 깨끗함이 머물러 사는 초당"이라는 의미로,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1595~1656)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임금이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자 척화의 뜻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두곡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며 지은 정자이다.

 

경행사(景行祠)

 

사당(묘우)인 경행사에는 이상정과 아우인 이광정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묘우) 안내

 

전사청(典祀廳)

 

제사용 그릇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제향때는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다

 

안동의 호계서원에 대하여 잠시 설명

 

담장뒤의 고산정사

고산서원 관리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