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선생 초상화
조위(曺偉)선생은 자는 대허라 하고 호는 매계(梅溪)라하니 세칭 매계선생으로 불리운다.
선생은 1454년 (단종2년 갑술) 봉산면 인의동에서 울진현령 계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할아버지가 심인데, 여말 고려의 국운이 상잔, 다함을 한하여,
김산(현 김천)으로 낙향한 창녕조씨의 김산 입향조가 되며,
음으로 산원을 지냈으나 30세로 조세하고 뒤에 병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선생의 증조부는 단성좌명공신으로 서성군에 봉해진 밀직부사 추봉 의정부좌찬성 경수이며,
고조부는 판전의 사사 중 문하시중 창성부원군 우희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특이하여 동생 적암 신과 같이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고
7세때 능히 시문을 지어 이름이 났으니
이 때의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그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 하였다.
선생은 10세때 영남사림의 종사이자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일취월장 하였고,
11세대 종숙부인 영의정 충간공 석문에게 소학을 친수받으니 충간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 장래를 촉망하고 가숙에 머물게하여 경서의 이치와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었다.
선생은 충간공의 집에서 18세때 성균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21세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곧 바로 승문원 정자를 배하고 다음해 예문과 점열을 배하였다.
1497년(성종 10년) 선생 26세 때 홍문과 부수찬으로 배하였는데
이때 영안도(함경도) 삼봉도의 난민을 초유코저 경차관을 선발하는데
조정에서 그 인선에 있어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때 성종게서 "조위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천품이 절륜하고 현명하다."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영안도경차관을 임명하였으니 과히 선생의 기량과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다음해 경차관에서 돌아온 선생은 성종의 두터운 지우를 받아 검토관 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가
성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여러차례 어진시제에 늘 장원을 독차지하여
성종께서 "문예에는 조위가 제일이고, 무예에는 임득창이 제일이다." 하고 포상과 특진을 거듭 내렸다.
이동안 성주사고의 검열관을 지내고, 명나라 칙사의 원접사 강희맹의 종사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년 신축) 선생 28세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는데,
이때 성종께서 당나라의 시성 두보의 시를 언어하는 책임을 선생에게 맡겼다.
이에 선생께서 승 의침과 여러 성균관의 관료들과 심혈을 기울여 분유두 공부언해를
25권 17책으로 완성하고 그 시문을 썼다. 이것이 두시언해 초간본으로 우리나라 고문, 고어 연구에 있어
국분학사상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며, 값진 조상들의 유산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문헌이다.
그러나 전질이 전함이 없으니 학계에서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인조 10년 인간된 중간본은 전질이 전하여 오고 있다.
당시의 학자들이 한문만을 숭상하고 우리의 그을 천대하던 때
선생과 같이 국문에 뛰어난 조예로 유창한 필치와 충분한 어휘로 다듬어진 번역은
영구히 국어국문학의 소담한 밑천으로 겨레와 더불어 찬란할 것이다.
이 "두시언해"는 국정교과서 등에 교재로 등재돼있다.
다음해 선생은 사헌부 지평을 선생 30세때 세자 시강원이 설치되니
선생으로 하여금 시강원 문학을 삼았다.
이는 원래 노성한 학자를 임명하는 것이 통례인 바 선생을 임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발탁 이었으니 선생의 학문의 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이해 가을 명나라 사신을 따라 온 문사 갈귀라는 사람은 매우 학문이 높았다.
이때 성종께서 선생과 사신을 그와 함께 놀게 하여 그의 학문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후 우리 나라에서 명나라에 사신이 갔을때 갈귀가 선생의 안부를 묻고,
선생의 학문이 높음을 찬양 하였다 한다.
1484년(성종15년) 선생은 친노를 이유로 사직코자 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윤허하지 않고 고향 근처인 함양군수로 전보하였다.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학문을 진작시키고 인재양성에 힘쓰고 그 다스림이 어질고 너그럽고
간결 검소함을 근본하여 선치로 이름났으며 때마침 부상을 당하여
함양에 와있던 정여창과 어학강도 힘쓰니 그 문화가 울연하였다.
선생이 1491년 38세때 상복을 벗고 상경하니 당일로 의정부 검상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다음해 좌부승지, 우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492년 (성종 24년) 선생 40세때 가선 대부 호조참판을 배하였다.
이때에 성상으로부터 점필제 김종직 문집을 찬집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 문집을 편찬하면서 점필제가 지은 조의제문을 문집에 수록한 바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뒤에 무오사화때 선생이 연좌되어 화를 입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직제학을 명하고 정조사로 명나라에 사행할 것을 명하였으나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사임하였다.
이 무렵 고향집 시냇가에 초당을 짓고 계단을 쌓아 매.난.송.죽을 심어 매계당 이라 이름했다.
다음해 충청감사로 나가 선정을 베푸니 모든 사람이 선생의 덕을 사모하였다.
이해 겨울, 성종이 돌아가시니, 대왕의 총애를 깊이 받아온 선생의 슬픔이 극에 달하였고
지방에 있어 왕의 출상을 보지 못하는 애절한 연군의 정을 시로 지어 읊으니 모든 사람이 감동하였다.
1495년(연산원년) 선생이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이세겸, 신종호 등과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관인 김일손이 점필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담아 올리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록에 수록케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김일손을 비롯하여 소위 사림파로 지칭되는 명류들이 참혹한 화를 입게 되었다.
선생은 한성우뮨,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이해 7월에 전라감사가 되었다.
재임중 선생은 모친상을 다하여 고향에서 여묘 3년을 살고 상경하여
1498년 동지중추부사를 배명하고 이어 경연 특진관이 되었다.
이해 5월 선생은 '백관중 그 기량이 굉대하고 문장과 도덕이 제일이다."하고 ,
성절사로 임명 되어 명나라에 사행케 되었다. 이때 본국에서는 유자광등이 크게 사화를 일으켜
일시에 당대 명류들이 처간되니 선생 이 무사할 수 없었다.
선생은 점필제의 고제이며 또한 점필제 문집과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을 수록한 점을 들어
연산군이 격노하여 매계가 압록강을 도강하면 즉시 처단하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다.
이때 동생 신이 일찍이 요동땅에 추원결이라는 점장이가 있음을 들은 바 있어
가서 형의 앞날이 길흉에 대한 점을 쳤던 바, 그는 말없이 다만 한 구절의 글을 적어 주었는데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으나(千層浪裡翻身出)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 하지(也須巖下宿三宵)”라 하였다.
동생 신은 앞의 구절은 화를 면할것도 같으나 뒤귀절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였다.
일행이 압록강변에 이르니 김오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시 형을 집행 하는 것으로 알고 민망하게 여겻으나 매계 홀로 태연하였다.
이어 강을 건너 알아보니 재상 이극균이 선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충신을 처형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하여 극구간언하여 죽음을 면하고
경옥으로 잡혀오게되어 곧 장형을 받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520년 의주에서 전남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때 같은 사화로 의주에 유배돼 있던 환훤당 김굉필도 순천으로 이배되어 왔었다.
순천에서는 서문밖 옥천변에 살면서 맑은 물 수목이 우거진 곳에
돌을 모아 대를 쌓아 임청대라 명명하고 그 기문을 지어 항상 마음을 깨끗이하고
이곳에 올라 임금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연군의 충청과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이동안 우리나라의 유배가사의 효시가 되는 장편가사 만분가가 이루어졌으며 매계총화도 집필하였다.
이 만분가는 선생의 두시언해와 함께 크게 평가되는 국문학사상의 큰 업적이다.
선생은 순천에 온지 침식을 잃을 정도로 학문에 전념하고 간신배들이 나라를 오도하는 것을
걱정함이 지나쳐 득병하여 1503년 50세를 일기로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환훤당이 읍민을 이끌고 예를 다하여 치상을 할 즈음 고향 김산에서 동생 적암 신이 달려와
고향으로 봉구하여 익년 3월에 황간현 마암산 선영에 장사지냈다.
이해 12월 갑자사화가 다시 일어나 선생에게 전죄를 추록한다 하며 이미 장사까지 지낸
선생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를 하고 시신을 묘앞에 허뜨려 3일간 장사지내지 못하였다.
이로써 요동의 점장이가 써준 뒷 구절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 하지(也須巖下宿三宵)” 라
하던 일이 맞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으로 정국하니
선생에 대한 죄가 사면되고 이조참판으로 증직하여 자손을 녹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선생이 떠나신 후 24년이 지난 1527년 이행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선생의 주옥같은 시문, 기문등을 21편이나 수록하였으며 동문선에도 많은 시문이 수록되어 있어
선생의 시문을 일부나마 엿볼수 있게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후 60여년이 지난 1564년 고봉 기대승이 순천의 유생들의 주창에 따라
순천에 옥천서원을 창건하고 선생과 한훤당을 제정하였다.
이때 퇴계 이황이 서원명을 친필로써 현액하였으며
고봉은 이 서원의 연원에 관하여 기문을 지어 봉안하였다.
다음해 순천태수 구암 이정은 선생의 얼이 담긴 임청태진에 대를 다시 수축하고
그곳에 비를 세워 선현의 유허지임을 추모하는 곳으로 하였다.
이 임청대라는 비의 글씨역시 퇴계 친필로 돼있다.
한편 1648년 김산의 유림들도 경렴서원을 창건하고
선생과 점필제 김종직, 문혜공 최선문, 평정공 이약동, 남정 김시창등을 제정하였다.
선생 사후 205년이 되는 1708년 에 순천의 유생 수백명이
선생의 관직을 더 높히고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하니
숙종께서 "매계의 학문과 도덕이 참으로 크고 높은데 죽어서 화가 무덤에까지 미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증직하여 이조판서겸지연의 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오철자 총부도총관을 내리고
자헌대부로 가자 하였으며, 시호를 내려 문장공이 라 하였다.
선생 떠나신후 200여년이 지난 1718년 비로소 매계문집이 간행되었으니,
이는 사화와 누차의 병화 등으로 선생의 많은 유고를 사화때 깊이 간직하고
또한 암송으로 기억하여 전하여온 것을 바탕으로 하여 널리 수집하여
십권오책으로 인간하였으니, 선생의 방대한 저술에 비하여
오직 그 도도한 문장의 일단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선생의 평소 면모를 알아보기 위하여 명현들의 언행을 살펴보기로 하면,
점필제 김종직은 늘 말하기를 "내가 대허와 더불어 강논하면 마치 큰 강물이 도도히 흘러 막힘이 없으니
대허야말로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 하고 선생의 학문을 높이 칭찬하였다.
한훤당 김굉필은 선생의 재주와 생각은 일찍이 꽃봉오리 처럼 날아 오르고,
그 명성은 온나라안에 진동했다. 문장은 나라를 빛냇고, 그이 시는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생의 동생 적암 신 은 선생의 행장에서 "형은 기개와 도량이 너그럽고 넓어
비록 다급한 일이 있어도 조용하게 대처하였으며, 느긋하고 순하여 크게 저작에 뜻이 있었다.
모든 사물 에는 거스림이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순수하고 지극하였으며 평화롭고 화목하였다." 고 하였다.
이 밖에도 수없는 현인달사들의 주사와 찬사를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렵다.
선생은 조선조 초기 문물의 성세였던 성종조의 성리학의 대가로
당시 신진사류의 지도자인 점필제와 함께 사림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 또한 명필로 이름 높았다.
선생의 도도한 문장은 당대를 풍미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그의 원대한 경논은 국가의 기간이 되고 동량이 될만 하였다.
비록 중도에서 꺾여 포부를 다 펴보지 못하고,원통하게 적소에서 죽었으나
이땅에 선생의 주옥같은 글과 빛나는 저술이 남아있어 영구히 전하여질 것이며 더욱 광채를 발할 것이다.
1747년 선생의 요람지이자 유허지인 봉계에 후손들이 율수제를 건립하여 현재까지 보존하여 오고 있으며,
1989년 12월 문화공보부에서 선생의 생가 유허지인 매계구거 율수제 앞에
선생의 생가 유허지임을 명시하는 표석 와비를 세운 바있다.
또 김천문화원에 서는 지난 80년부터 매년 매계백일장을 열어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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