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선생 신도비
매계 조위 선생 연보
1454년(단종2년) 7월 10일 공은 금산(현 김천 봉산면) 봉계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자는 오룡(五龍)이다.
1455년(세조원년) 공의 나이 2세이다.
1456년(세조 2년) 공의 나이 3세이다. 8월에 아버지가 삼군진무(三軍鎭撫)를 제수 받았다.
1457년(세조 3년) 공의 나이 4세이다. 8월 아버지가 증약찰방(增若察訪)을 제수 받았다.
1458년(세조 4년) 공의 나이 5세이다. 공은 말을 배우자마자 곧 글자를 알았다.
서제(庶弟)인 신(伸)과 함께 배웠는데, 재주가 탁월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1459년(세조 5년) 공의 나이 6세이다. 7월, 아버지가 전농시주부(典農寺 主簿)를
제수 받았고, 9월에 감찰(감찰)로 전임되었다.
1460년(세조 6년) 공의 나이 7세이다.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고, 학업이 나날이 발전하여
사람들은 모두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대하였다.
7월에 아버지가 현풍 현감(縣監)에 제수되었다.
1461년(세조 7년) 공의 나이 8세이다. 현풍의 관아에서 생활하였는데,
오직 강독하는 데만 몰두하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허비하지 않았다.
1462년(세조 8년) 공의 나이 9세이다.
1463년(세조 9년) 공의 나이 10세이다. 6월에 아버지가 현풍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을에 공은 자형(姊兄)인 점필재(佔畢齋)에게 가서 배웠다.
1464년(세조10년) 공의 나이 11세이다. 정월에 서모인 민(閔)씨 부인을 따라 개령에 가서 살았다.
가을에 아버지가 공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당숙인 충간공(忠簡公)께 질품(質稟)하니,
충간공이 보고서 크게 될 인물이라고 여기고, 집안에 머물게 하고 친히 소학을 가르쳤다.
충간공의 휘는 석문(錫文)이다.
1465년(세조11년) 공의 나이 12세이다. 창령군(昌寧君)의 집에서 독서를 하며 경전의
이치를 따져서 물으며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창령군은 충간공이다.
1466년(세조12년) 공의 나이 13세이다.
1467년(세조13년) 공의 나이 14세이다. 10월, 아버지가 울진(蔚珍)현령으로 부임하자 수행하였다.
12월, 집으로 돌아왔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울진관아로 돌아왔다.
1468년(세조14년) 공의 나이 15세이다.
9월, 세조대왕이 돌아가시고, 12월에 장순왕후 한씨(韓氏)가 돌아가셨다.
1469년(예종원년) 공의 나이 16세이다. 11월, 예종대왕이 돌아가셨다.
1470년(성종원년) 공의 나이 17세이다. 3월, 공은 강릉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당시의 강릉부사는 鐵城(철성) 박식(朴殖)이었다.
8월, 울진으로 귀성했다가 다시 강릉을 경유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1471년(성종 2년) 공의 나이 18세이다.
8월, 생원(生員), 진사(進士) 초시(初試)를 모두 수석으로 급제했다.
1472년(성종 3년) 공의 나이 19세이다.
정월, 사마시(司馬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여 창년군집에 방을 내붙였다.
금산(현 김천)에 가서 영예롭게 선영을 소분하고, 울진에 가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이어 창녕(昌寧)과 영산(靈山)에 있는 선산을 성묘하고,
되돌아 함양(咸陽)에 가서 강론하고 질문하는데 아는 것이 많아 막힌 데가 없었다.
그때 점필재가 군수로 역임하고 있었다.
대개 공은 어려서부터 점필재에게 학업을 전수 받았는데, 사림에서 우러러 봄이 점필재에 버금갔다.
6월, 아버지가 울진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다스릴 때는 한결같이 검약을 힘썼으며,
공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로 다시는 출사(出仕)에 뜻을 두지 않았다.
1473년(성종 4년) 공의 나이 20세이다. 반궁(泮宮)에 다니면서 관시(館試)에 합격하였다.
1474년(성종 5년) 공의 나이 21세이다.
봄에 실시한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창녕군집에 방(榜)이 나붙었다.
4월, 공혜왕후(恭惠王后) 한(韓)씨가 돌아가셨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겨울, 신씨(申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부인은 거창 현감인 윤범(尹範)의 여식이다.
1475년(성종 6년) 공의 나이 22세이다.
정월, 금산으로 귀근하여 조모인 정 씨(鄭氏) 부인상에 슬픔을 다하였다.
3월, 상경하였다. 10월, 한림연(翰林宴)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금산으로 돌아왔다.
12월, 조모를 금산 방목산(放牧山)의 북동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서제인 신(伸)과 능여사(能如寺)에서 독서를 하였다.
1476년(성종 7년) 공의 나이 23세이다.
6월, 성종임금은 공과 채수(蔡壽), 권건(權健), 허침(許琛), 유호인(兪好仁), 양희지(楊熙止)등
6명을 선발하여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하였다.
1477년(성종 8년) 공의 나이 24세이다. 정월에 홍문원(弘文院) 정자 겸 독서당(讀書堂)
봉교(奉敎)에 임명되어 독서당기(讀書堂記)를 찬진(撰進)했다.
봄에 여러 친구들과 송도(松都)를 유람할 것을 약속하고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송도록(松都錄)을 간행하였다.
8월, 충간공(忠簡公)이 작고하자, 공이 가정판관(加定判官)이 되었다.
10월, 충간공을 장단(長湍)에 장사 지내고, 독서당으로 돌아왔다.
1478년(성종 9년) 공의 나이 25세이다.
3월,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으로 승진하여 다시 본관(本館)에 근무하도록 명을 받았다.
4월, 금산에 귀근(歸覲)하였다.
6월,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와 임사홍(任士洪)을 논박(論駁)하였다.
7월, 박사로 승진하였다. 충간공의 행장을 찬(撰)하여 이승소(李承召)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청하여 비석을 세웠다.
1479년(성종10년) 공의 나이 26세이다.
2월,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다. 5월,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9월, 영안도(永安道)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되어 길을 떠났다.
1480년(성종11년) 공의 나이 27세이다. 2월, 영안도에서 돌아왔다.
8월, 포쇄관(포曬官) 으로 임명되어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와 본가에 귀근하고,
성주(성주)로부터 창녕과 영산을 거치며 조상의 묘소에 술과 과일 등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고, 밀양으로 점필재 선생을 찾아뵙고, 다시 성주로 돌아와서 포쇄하였다.
10월, 다시 가족을 이끌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1481년(성종12년) 공의 나이 28세이다.
3월, 원접사(遠接使)인 강희맹(姜希孟)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8월, 반송사(伴送使)종사관으로 사명을 받고 관서(關西)지방에 갔다가 황해도를 지나며
변경고을의 농사를 두루 살폈다.
12월, 금산으로 귀성했다가, 왕명을 받들어 두시서(杜詩序)를 지어 올렸다.
1482년(성종13년) 공의 나이 29세이다.
4월,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조위(曺偉)와 김흔(金訢)은 둘 다 진용(進用)한 자이니,
“한 계급을 올려주라” 고 명하셨다.
7월,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8월, 사직서를 올리고 귀근하였다.
1483년(성종14년) 공의 나이 30세이다. 3월, 정희왕후(貞喜王后) 윤씨가 돌아가셨다.
성종은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하고 문학(文學)에 임명하였으며,
10월에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반송사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전당(錢塘)사람인 갈귀(葛貴)가 칙사(勅使)를 따라 왔는데, 문장에 조예가 있었다.
성종은 공과 신종호(申從濩)에게 명하여 갈귀를 접대하라고 하였는데,
그의 학문을 묻고,이어 중구의 일을 묻자, 갈귀가 공의 재주와 학식에 탄복하고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다고 칭송했다.
1484년(성종15년) 공의 나이 31세이다. 2월, 공은 명나라에서 돌아왔다.
4월, 손소(孫昭)의 치전관(致奠官)이 되어 금산으로 귀성했다가 선산(善山)을 길 잡아 영천,
경주, 양산, 밀양을 거쳐 다시 영산과 창녕의 조상묘소에 간단한 제물로 제를 올리고 돌아왔다.
5월,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8월 걸군(乞郡)하여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그가 함양을 다스리는데, 어짊과 너그러움, 간결하고 검소한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9월, 백부상을 당하여 분곡(奔哭)하고,
12월, 장례를 마치고 관아로 돌아왔다.
1485년(성종16년) 공의 나이 32세이다.
성종의 명령으로 세초시(歲抄詩)를 지어 올리자, 칭찬을 하고 부모님께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또 하서(下書)하여 포상하여 상을 주자, 공은 진사(陳謝)의 표전(表箋)을 올렸다.
1486년(성종17년) 공의 나이 33세이다.
1487년(성종18년) 공의 나이 34세이다.
1488년(성종19년) 공의 나이 35세이다.
1489년(성종20년) 공의 나이 36세이다.
공은 군청에 근무하며 정무를 본 6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귀근의 예와 봉양의 물품을 준비하는데, 그 정성을 다하였다.
2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임금께서 부의로 쌀과 콩, 기름, 꿀 등을 하사하였다.
5월, 황간현(현 대항면) 마암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1490년(성종21년) 공의 나이 37세이다.
1491년(성종22년) 공의 나이 38세이다. 2월, 3년 상을 마쳤다. 4월, 담사(담사)를 지냈다.
5월, 검상(檢詳)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장령(掌令)으로 옮겼다가 동부승지(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2월, 금산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돌을 모아 계단을 만들고, 꽃을 심어서 그윽한 운치가 나도록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매계동”이라고 하였다.
1492년(성종23년) 공의 나이 39세이다. 도승지(都承旨)로 옮겼다.
이 해 가을 점필재가 돌아가시자 가서 곡을 하였다.
1493년(성종24년) 공의 나이 40세이다.
6월,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공에게 점필재의 시문(詩文)을 모아 책으로 엮으라고 명하였다.
8월, 정조사(正朝使)로 임명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함을 이유로 장계를 올려 관직을
내놓고 물러났다. 어머니의 수연(壽宴)을 베풀고 금산으로 돌아와 살았다.
9월, 선영에 분황제(焚黃祭)를 올렸으며, 아버지의 묘 앞에 표석을 세우고, 비석의 뒤에
관력과 생년월일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전비(前妣)의 묘에도 비석을 세웠다.
점필재의 신도비명을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에게 청하였다.
공은 작은 시냇가에 초당을 지으며, 계단을 쌓고 소나무와 국화, 매화, 대나무 등을 심고서
이름을 짓기를 “매계당”이라고 이름 했다. 홍 허백이 기문을 지어 그곳을 빛냈다.
1494년(성종25년) 공의 나이 41세이다. 충청감사에 임명되었다.
성색(聲色)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온 도내가 화합하였다.
12월, 순행길에 황간에 와서 마암산 선영에 성묘하였다.
이달, 성종대왕이 돌아가시자, 반염(攀髥)하지 못함을 원통하게 여기고
10편의 절구시를 써서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붙였다.
1495년(연산군 1년) 공의 나이 42세이다.
4월, 체직(遞職)되어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임명되어 서울에 도착하자,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졌다. 7월, 금산으로 돌아오자,
같은 달 23일에 전라감사로 임명되어, 8월에 부임하였다.
10월에 어머니가 금산에서 돌아 가시자, 문상하는데 너무 슬퍼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묘지를 홍 허백에게 청하여 12월에 마암산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루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496년(연산군 2년) 공의 나이 43세이다. 4월, 어머니의 묘 앞에 표석을 세웠다.
1497년(연산군 3년) 공의 나이 44세이다. 10월, 3년상을 마쳤다.
12월, 담레(潭禮)를 지내고 창녕과 영산에 가서 조상의 묘소에 간단한 제물로 제를 올렸으며,
밀양에 가서 점필재 선생의 묘에 제를 올렸다.
1498년(연산군 4년) 공의 나이 45세이다.
2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성절사(聖節使)가 되었다.
4월에 출발하는데, 홍 허백이 송서(送序)를 지어 송별하였으며, 서제인 신(伸)이 수행하였다.
5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6월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7월, 적신(賊臣) 유자광(柳子光)이 사옥(史獄)을 일으키고
점필재가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반역을 꾀할 뜻이 있다고 하였다.
연산군은 평상시에도 선비들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참언(讒言)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점필재를 대역죄인으로 논죄하고,
즉시 부관참시(副棺斬屍)하고, 김일손(金馹孫)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명령하니,
한 시대의 명사들이 모두 당고(黨錮)의 화를 입었다.
그때 공은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연산군은 압록강을 건너오자마자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8월 15일, 공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비로소 그 소식을 들었다.
26일, 압록강에 도착하자 멀리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일행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다만 공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으며,
강을 건너자 형벌이 바뀌어 붙잡아 오라는 명으로 바뀌었다.
9월 9일, 서울에 들어와 하옥되었고, 같은 달 17일에 죄가 판결이 났으며,
같은 달 20일 의주로 귀양을 갔다.
1499년(연산군 5년) 공의 나이 46세이다. 여름, 유배지에 작은 정자를 지어서 규정(葵亭)
이라고 이름 짖고, 그 기문을 지어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붙었다.
1500년(연산군 6년) 공의 나이 47세이다.
여름, 날씨가 가문데도 천둥벼락이 궐문밖에 사람에게 치자,
원통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령하고, 귀양 간 신하들을 이배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5월, 순천부로 이배되어 서문 밖에서 우거(寓居)하였다.
이때 한훤당(寒喧堂)공도 또한 희천에서 이곳으로 이배되어서 서로 도의(道義)를 강론했다.
1501년(연산군 7년) 공의 나이 48세이다.
순천부의 서쪽에 시내가 있었는데 이름이 옥천이라고 했다.
수석이 청아하고 수려하고, 오래된 고목들이 앙상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공이 살고 있는 집과도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돌을 쌓아 누대를 만들고,
“임청”이라고 이름을 짖고 유유자적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또 기문을 지어서 그 뜻을 붙였다.
또한 한훤당 김 공도 일찍이 오고가며 학문을 논하였다.
1502년(연산군 8년) 공의 나이 49세이다.
공은 폐적(廢嫡)된 이후 학문에만 전념하느라 거의 침식을 잊었으며,
오직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만 하였다.
1503년(연산군 9년) 공의 나이 50세이다.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감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병이 생겨 11월 26일 유배지에서 작고했다.
한훤당이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예를 갖추어 상을 치렀다.
그때 동생인 신(伸)은 금산에 있었는데,
공의 병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갔으나 이미 염을 마친 뒤였다.
고향으로 운구하고, 묘지를 홍 허백에게 청하였다.
1504년 3월 일, 마암산 선산언덕의 동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
9월,진신(瑨紳)의 화가 다시 일어나자, 공은 전죄가 추록되고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었으며,
11월에 화가 구천에까지 미쳐, 마침내 공의 시신이 다시 아버지의 묘 앞에 놓여졌다.
공의 정실부인과 첩은 모두 자식이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여,
신(申)부인이 종제(從弟)인 군수(郡守) 척(倜)의 아들 사우(士虞)를 아들로 삼았다.
1506년(중종 1년) 중종이 나라를 다스려 대평하게 한 지 2년인 정묘년(1507년),
원통한 죄를 거슬러 올라가 풀어주고, 공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경연춘추관성균관사(經筵春秋館成均館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홍문관(弘文館)제학(提學),
예문관(藝文官) 제학(提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 하였으며,
자손에게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1518년(중종13년) 신(申)부인이 신(伸)에게 명하여 표석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매계공은 평생토록 자신을 낮추고 실력을 남에게 들어내지 않는 것을 스스로의 경계로 삼았는데,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먼 변방으로 내침을 당했으니,
실로 나의 죄가 크다. 내가 죽거든 절대로 나의 행적을 선양하지 말고,
다만 묘석 (墓石)에 관위(官位)와 성명만 쓰라.” 고 하였다. 지금 연표를 기록하는데,
공의 출처의 대강만 서술하고, 끝까지 그 덕행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공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1527년(중종22년) 2월 10일, 신(申)부인이 세상을 하직하니, 4월에 공의 묘소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시부모를 섬기는데, 예를 다하였으며, 남편을 받드는 데에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일상의 일을 처리하거나 임시변통을 할 때에도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실로 부인 가운데 군자(君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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