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曺偉)선생은 본관이 창녕이고 호가 매계(梅溪)이다.
단종2년(1454)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 봉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위 선생의 아명은 오룡(五龍)인데 서제(庶弟)인 조신(曺伸)과 함께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일곱살에 시를 지을줄 알았다
그러나 조위의 학문은 김종직과의 만남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가 열살때 누나가 김종직에게 출가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김종직의 문인이 됐다
자형 김종직 에게서 예기와 문장을 배운 조위는 18세때 생원진사에 3장 장원급제했다
21세때 문과급제하면서 관계에 진출하여, 승문원정사 예문관검열을 거처
홍문관 교리 박사, 그리고 일본 통신사 이향원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는데, 이무렵 조정에서는 세종때 착수했던
중국 만당의 시성 두포의 시를 언해하는데 심혈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성종은 이작업의 최고 책임자로 명문장가이며 국문에 조예가 깊은 조위를 임명했다
성종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건국이념인 유학의 핵심인 정통사상과 대의 명분을
뿌리체 흔들어 놓게되자 이점을 염려하여 우국충절의 내용이 풍부한
두보의 시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므로서 민심을 국왕과 국가에 돌리려고 했다.
성종12년 조위가 28세 때 유윤겸 의첨(義砧)등과 함께 완성한 두시언해는
조위가 서문을 쓰고 활자로 인쇄했다
그 후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을 역임한 조위는 31세때 부모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자청해 고향부근인 함양군수가 되었는데, 조선초 이래 위친걸군(爲親乞郡)한
김숙자, 김종직,,문인 유호인 조위 정여창등이 실천에 옮겨
성리학 윤리를 실천하고 지방교육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굉필 정여창이 도학에 치중하여 만년에는 시작(詩作)에서 손을 때다싶이 한 반면
조위 유호인 김일손등은 문장과 경사에 뛰어났다.
특히 조위는 시노(詩老)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20대에 성종 제일의 충신이 됐다
김종직이 성종23년에 죽자 조위는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었는데 이것이 후일 무오사화때 유자광 이극돈에게 역신으로 몰리는 단서가되었다.
의주로 귀양갔다가 다시 순천으로 이배된 조위는 옥천(玉川)가에 임청대(臨淸臺)라는
단을 쌓고는 같이 귀양온 문우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짓기도했다.
이무렵 그는 만분가를 지어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길없는 비분을
천상의 옥황(성종)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가 지은 이 만분가는 국문학 사상 유배가사의 효시로서 높이 평가 받고있는 것이다
*이 무술본은 건.곤(乾,坤) 2책으로 되어있는데
고서점에 나와 있는것을 문중에서 2013년 2월 4일(입춘)에 구입한것이다.
매계 조위선생은 50평생을 출사의 여가에 한묵과 함께 살다 간 문인으로,
수많은 시.학문과 도를 논한 글을 남겼으나, 애석하게도 그가 다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고 가산이 적몰당할 때 모두 일실되었다.
후에 서제인 조신(曺伸)이 산일된 유문을 수잡.편차하여 간행하였는데,
이 본은 완본이 현존하지 않고 영본 1책(권1)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초간본이 일실되어 전하지 않자 1718년(숙종 44년 무술년)에 당시 금산군수(현 김천시장)로 있던
김무의 주선과 노력으로 조신이 엮은 원고를 바탕으로 저자의 5대손 조술(曺述.경매당)이 가장해온
초본을 얻어 정호의 서문과 권상하의 발문을 책의 머리에 싣고, 김무 자신의 발문,
여기에 그의 형인 김유의 발문과 후손인 경매당 조술(曺述)의 발문을 더하여 간행하였다.
그 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차례 중간이 시도 되었으나 경제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약 150년이 지난 무진년(1928년)에 와서야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이 중간본은 매계의 13세손 조경승과 후손 조병태의 주도로
김영한의 서문을 받아 석인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초간본인 무술본은 권두에 매계의 연보와 4권의 시문, 1권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본인 무진본에는 연보와 시문, 그리고 부록을 포함하여 10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무진본은 무술본의 시.문원고를 증정하고 여기에 경연일기와 왕조실록에서 찾아낸
매계와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여 석인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 매계집 발간 추진경과
1718년(숙종 44) 금릉군수 김무(金楙)가 저자의 후손 조세붕(曺世鵬)과 함께
초판을 간행하고 그 판각을 직지사(直指寺)에다 두었다.
그 뒤 화재로 인해 그 판각은 불타 없어지고,
1928년 후손 조경승(曺璟承)·조병태(曺秉台)·조세우(曺世雨) 등이
"경연일기(經筵日記)" "사화록(士禍錄)" 등에서 발췌한 것을 합해 다시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호(鄭澔)·권상하(權尙夏)·김영한(金寗漢)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유(金楺)·김무·김재로(金在魯),
그리고 저자의 후손 조술(曺述)·조임(曺霖)·조경승·조병태·조세영(曺世永)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연보, 권2∼4에 시 353수, 권5에 시 26수, 서(書) 1편, 서(序) 5편, 기(記) 10편,
권6에 묘지명 1편, 묘표 2편, 소(疏)·전(箋) 각 1편, 잡저 3편, 권7에 계(啓)·의(議) 각 수 편,
권8∼10에 부록으로 사화실기(史禍實記)·행록(行錄)·호당록(湖堂錄)·잡지(雜識)·제문·
묘지명·묘표·행장·시장(諡狀)·신도비명·송계서원봉안문(松溪書院奉安文)·경렴서원상량문
(景濂書院上梁文)·경렴서원봉안문·청시소(請諡疏)·시연운(諡筵韻)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저자가 1498년(연산군 4)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을 오고가면서 지은 것과
국내에서 읊은 시로 구분되어 있다.
국내에서의 시는 저자의 자형(姉兄)이자 스승인 김종직(金宗直)과 창화한 것이 비교적 많다.
서(序)에는 1481년(성종 12) 왕명으로 두시(杜詩)를 언해(諺解)한 뒤
그 내력을 적은 두시서(杜詩序)가 있다.
기에는 1477년 성종이 집현전 대신 예문관을 설치하고 이어 문신들의 독서 장소로
용산(龍山)에 위치한 공해(公廨)를 독서당(讀書堂)으로 개조한 뒤 그 내력을 적으라는
명을 받고 쓴 독서당기(讀書堂記)가 있다. 또한, 1483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죽자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가 그 유지를 받들어 죽은 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를 중창했다는 내용의 해인사중창기(海印寺重創記)를 작성했다.
계와 의는 1479년 4월에서 1493년 10월까지의 사이에 경연(經筵)에서 논의했던 일들을 적은 것이다.
사화실기에는 성종의 명에 의해 김종직의 시문을 찬집하게 된 것이 저자가 2차에 걸쳐
참혹한 화를 당하게 된 동기가 되었음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밖에 김굉필(金宏弼)·홍귀달(洪貴達)·김일손(金馹孫)·이재(李縡)·송시열(宋時烈)·윤염(尹琰),
그리고 이정보(李鼎輔) 이하 27명의 저자에 대한 각종 기록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매계집 [梅溪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재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매계집은 목판으로 판각한 무술본으로
서강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이며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국문집총간 16권으로 표점. 영인하여 간행한것이다.
여기에 1988년 석인판으로 간행한 무진본을 홍순석박사의 주도로
한국고문헌연구회에서 편집하여 계명문화사에 의해 영인된것이다.
목판본인 무술본의 석판본인 무진본의 편차를 비교하여 보면
무술본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진본은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초간본인 무술본에는 시가 모두 289제 386수가 실려 있고,
중간본인 무진본에는 292제 379수가 실려있어
초간본인 무술본이 중간본 무진본보다 7수의 시가 더 실려있다.
매계선생 문집 서 (전문)
조선이 건국된 후 300년이 흐르는 동안 사화가 일어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나,
무오, 갑자사화와 같은 참람함은 일찍이 없었다. 불충한 신하인 유자광이
그의 사사로운 유감을 풀려고 크게 사옥을 일으키자 한 시대의 명현과 석사들이
연달아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어 거의 다 제거 되었다.
돌아가신 참판 매계 조 선생도 그 중에 한 분이시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어질고 후덕하였고,
재주와 행실이 매우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관을 갖추고 점필재의 문하에서
한훤당과 일두등 재현들과 시종일관 서로 도우며 학문과 품성을 닦았다.
태평성대인 성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출사하여 홍문관에서 명성이 자자하였고,
마치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하여, 천재일우라고 이를 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종이 갑자기 승하하시자 시사가 크게 변하여 임금(연산군)의 덕이
날로 어두워지고, 간악한 불꽃이 날로 거세어져서 6,7년동안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부수고
육시하는 참상이 갈수록 더욱 참혹하였다. 무릇 여러 현인들의 말과 저술들은
거의 다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선생의 이력과 일부 작품들은 다행히 서재인 적암 조신이 수장하고 있던
책 상자안에 남아 있어서 다 유실되지 않아 후인들로 하여금 헤아려 불 수 있게 하였다.
작위와 시호를 추증하고 사우를 세워 제향을 받드는 일은 처음부터 많은 선비들이
청원함이 있었고, 결국 성조의 승낙을 받게 되었다.
어찌 하늘이 정한것이 사람이 정한것을 움직인 것이 아니겠는가?
금릉은 본래 선생이 태어나고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향이다.
내 친구인 김덕보가 이 고을의 군수로 부임하여 선생의 후손들이 보잘것 없게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선생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을 구할 수 없음을 개탄하여,
선생이 지은 문장과 시 약간 편을 찾아 결국 봉급을 얻어서 기술자를 구하여
선생의 시문집이 오래도록 전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하였다.
선생의 후손인 세붕(世鵬)은 그 일이 고향의 많은 선비들의 뜻이라고 여기고,
나를 찾아와서 책의 서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아아! 나는 보고 들은 것이 적은데,
어찌 감히 떨쳐 드러낼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옛날부터, 점필재가 일찍이 선생 학문의 경지를 인정하고, 말하기를
"내가 태허(조위)와 학문울 강론하면 마치 강하를 터놓은 듯하니
태허는 진정 나의 스승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홍허백이 일찍이 선생의 문장을 칭찬하기를 "구름을 쏟아놓고 무지개를 뿜어낸 듯
문채가 만 길이나 빛난다." 라고 했다.
그 후 문정공 우암 선생이 선생의 문장과 도학을 논평하여 단정하기를
"학문의 여사인 문장으로 왕조를 아름답게 빛내고, 경연에서 경술을 강론할 때,
그 자신이 기와 고요가 될것을 기약하였다. 또 퇴계와 고봉등 여러 선생들도
손수 누대의 편액을 짖기도 했고, 연원을 기술하여 남은 유감이 없게 하였다.
아아! 이러한 말들을 본다면 선생의 시말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나의 한 두 마디의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겠는가?
김 군수의 이름은 무요 덕보는 그의 자이다.
그가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낸 공은 또한 칭찬할 만하다.
숭정 갑신 후75년 무술(1718년, 숙종 44년) 늦봄 하순,
오천후인 정호(鄭澔)가 서하다.
2009년 3월 1일에 초판 간행된 이 매계집(梅溪集)은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조위(曺偉)의 한시와 산문을
공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 이동재(李東宰)교수가 한글로 역역하여 옮긴 것으로
총 602쪽이며 평사리(서울 마포구 신수동)에서 펴냈다
한편 2012년 10월 11일 김천문화원강당에서 역사인물 주인공인
"매계 조위선생의 학문과 사상"이란 주제로
제8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회가 개최되었는데
기조발표는 "매계 조위의 삶과 사상적 지향" 이라는 제목으로
매계집 한글판 역자인 공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이동재교수가 하였고
제1주제는 "조위 시(詩)에 나타난 15세기 후반 관인상과 그 의미" 로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김창호 교수가
제2주제는 "매계 조위 유배시의 특징 연구"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진경 교수가
제3주제는 "매계 조위의 연행문학 연구"로 공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이성형 교수가
각각 많아 발표를 했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유선의 깃발과 부절이 하늘에서 내리니 儒仙旄節下靑冥(유선모절하청명)
멀리 해를 잡고 지극한 정성 의지하네. 遠搏扶桑仗至誠(원박부상장지성)
만리에 고생하니 해가 솟은 듯 하였고 萬里間關廓日出(만리간관확일출)
천년에 즈음하여 황하의 맑음을 만났네. 千年際會値河淸(천년제회치하청)
수심으로 병든 비를 보고 나르는 솔개 떨어지는 듯 하였고 愁看瘴雨飛鳶阽(수간장우비연점)
기쁨으로 바람만난 돛대보고 춤추는 새가 가볍게 나는 듯 하네. 喜見風帆舞鷁輕(희견풍범무익경)
이번에 고향을 버리는 듯 가신 본래 뜻은 此去桑弧聊素者(차거상호료소자)
남자로서 다만 공명 때문이 아닐 것이로다. 男兒不獨爲功名(남아부독위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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