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중종원년(1506년) - 중종38년(1543년)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원년(1506) 11월 11일(제1권 p139)
O 전교하기를,
“죽은 안양군. 봉안군은 계성군(桂城君). 전성군(全城君) 예에 의하여 각각 미. 태 50석, 종이 1백 권, 정포(正布) 30필, 백저포(白苧布) 5필, 목면 5필, 석회 30석, 진유(眞油) 7두 5승, 청밀(淸蜜) 5두를 제급하고, 패주 때 무죄하게 귀양 가서 죽은 자인 봉안군 봉. 안양군 항, 우산군 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표 연말(表沿沫), 참판(參判) 조 위(曺偉), 권 주(權柱), 관찰사 남궁 찬(南宮璨), 참판 이 창신(李昌臣)은 혹 적소(謫所)에 빈소를 치렀거나 혹 고향에 장사지낸 이도 있으니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죽은 판서 이 세좌도 또한 예로 개장(改葬)하라.” 하였다.
중종 3년(1508) 11월 일(제7권 p47)
O 세인이 또 아뢰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이는 효를 충성으로 옮길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성종조(成宗朝)의 김 종직(金宗直), 유 호인(兪好仁), 조 위(曺偉)가 그 어버이를 위하여 사직하자 문득 그 인근 수령을 제수하셨고, 그 사람들도 또한 정사에 근실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충효겸전(忠孝兼全)인 것입니다. 지금 훈련원 부정(副正) 정 희주는 막 녹봉을 받을 때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받지 않고 사직서를 올렸습니다. 그의 친구가 녹봉을 받도록 권한바 있었으나 사양하기를, 만약 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것은 어버이를 위함이 아니다. 하고 즉시 가기를 결심 하였습니다. 무반(武班)으로써 이와 같으니, 그 절개가 어찌 고상하지 않겠습니까? 어 영준도 또한 어버이를 위하여 귀향을 하였으니 이는 사람들이 다 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지금 이러한 사람들에게 수령을 제수하면 비록 어사(御使)를 보내지 아니하여도 이들이 하나의 어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홍문관과 대간이 그 어버이를 위하여 정사(呈辭)한 자가 있으면 과연 그 가향(家鄕) 근방 수령을 제수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법을 세워서 제수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늙고 병든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까지 제수하지 않는다면 미편한 일이니 근읍 수령을 차임하라.” 하였다.
중종 6년(1511) 3월 14일(제13권 P89)
O 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 세인이 아뢰기를,
“지금 글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잦추어 가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조에 문사들을 교육 양성하여 인재가 크게 성하였으니, 최 숙정, 성 현, 조 위(曺偉), 유 호인, 박 은, 김 맹성, 이 세겸 같은 이들이 모두 한 때의 명현이요, 김 시습, 남 효은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아니지만 또한 한때의 문사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 유고(遺稿)가 모두 묻히고 없어져 전하지 않으니 후의 사람들이 무엇으로 일시 문장의 성함을 알겠습니까? 또 시사(詩詞)는 본래 그 풍요(風謠 지방 풍속을 자료로 노래 한 것)를 노래하여 읊은 것인데 이것으로 하여 그 풍속의 오융(汚隆)과 정치의 승강(升降)을 알 수 있는 것이니 크게 정치 체제에 관계되는 것으로써 민멸(泯滅)하여 전한이 없게 할 수 없습니다. 위의 몇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선인의 유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니 청컨대 모아 거두어서 편집하여 개간(開刊) 전파함이 매우 마땅한가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명하여 이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 편집하여 개간하게 하였으니 다시 명하여 속히 간행하게 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중종 21년(1526) 9월 5일(제57권 P104)
O 이조(吏曹)가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의 의망을 아뢰니, 낙점하지 않고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는 모두 폐조(廢朝) 때 죄를 받은 사람들의 자손이다. 청백리 자손도 아울러 의망하는 것이 어떤가?”
하매, 판서 허 굉이 아뢰기를,
“신등의 뜻에도 청백리 자손을 의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받은 사람들의 자손들은 부록이 있고 청백리 자손은 부록이 없기 때문에 못했습니다.”
하니, ‘알았다.“ 전교하고, 박 인량에게 낙점하였다.(의망 했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박 은의 아들 박인량, 김 천령의 아들 김 만균, 조위(曺偉)의 아들 조 사우(曺士虞), 강 형의 아들 강 속, 이 극중의 손자 이 수충이다)
중종 28년(1533) 7월 말일(제75권 p75권)
O 김 안로가 아뢰기를,
“별초문신의 정시(庭試)때 파산(罷散)하여 지방에 있는 사람에게 글제를 보내어 글을 지어 올리게 한 일에 대하여 하문 하셨는데 신은 조종조의 일을 알지 못하나, 다만 조 위(曺偉)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라던가 유 호인이 합천군수로 있을 때 항시 제출한 것을 모두 올리게 해서 친히 보셨습니다. .......(중략)
중종 32년(1537) 1월 일(제83권 p87)
O 김 안로가 아뢰기를,
“가자를 주는 일은 제때가 아니면 안 되겠으나 변통하는 편법이 없어서도 안 됩니다. 서너 자급을 뛴다면, 뒤 폐단이 없지 않으므로 혹 말 하는 자가 있겠으나 대간. 시종이라면 한두 자급을 뛰어 올려도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무슨 방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조종 때에는 쓸 만한 사람이면 자급을 주어 승서한 때도 있었는데 성종 때에 조 위(曺偉) 및 아비 흔(?) 두 사람은 제 때가 아닌데도 특별히 자급을 내리고 명하여 지금은 승서하지 않을지라도 뒤에 크게 쓸 것이므로 특별히 한 자급을 내린다 하였습니다. 지금 혹 자급을 주더라도 마땅하다면 방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 34년(1539) 3월 2일(제89권 p117)
O 홍 언필이 아뢰기를,
“형편으로 말하면 반드시 합영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중략)
조 신(曺伸 조 위의 서출 아우로 시에 능하였다)은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성종께서는 오히려 그를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재능이 있는 자라면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 같은 무리는 비록 천사의 유관(遊觀)에는 참여하지만 어찌 문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문장에 능한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조실록을 살펴보니 정말로 우리나라 문장의 훌륭함을 많이 칭찬하고 있었다.” 하였다.
중종 36년(1541) 11월 일(제96권 p268)
O 홍 언필이 아뢰기를,
“(중략) 옛날에는 월과(月課)를 제출하고 대제학이 친히 홍문관에 나아가 그 우열을 가렸습니다. 성종조 때 조 위(曺偉)가 그때마다 일등을 하므로 어떻게 이토록 잘 짖는가? 라고 하문하자, 우연일 뿐이다 고, 대답하니 너의 말이 옳다, 하고 포상하고 장려함이 극진하였는데, 지금은 그 같은 일이 없기 때문에 힘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략)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합당하다.” (이하생략). 하였다.
중종 38년(1543) 3월 일(제100권 p243)
O 홍 언필은 아뢰기를,
“신 잠이 어찌 서얼들과 함께 일을 하겠습니까? 신 숙주의 손자이고 종학의 아들로써 나이가 이미 오십이 넘었습니다. 김 안국이 늘 그 재주가 아깝다고 하였습니다. 성종조에 조 신(曺伸)은 바로 조 위(曺偉)의 얼제(孼弟)로써 성종께서 때로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는데 비록 문신의 반열에 두지는 않았지만 중국 사신이 올 때면 매번 그에게 사화(詞華)를 윤색(潤色) 하도록 하였습니다. (중략)
중종 38년(1543) 10월 10일(제101권 P68)
o 상이 이르기를,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자주 할 수 없더라도 대신과 대신들을 보내어 강경하기도 하고 제출하기도 하면 유생이 즐겨 나올 뜻을 가질 것이다.”
하였는데, 영사 홍 언필이 아뢰었다.
“위에서 분부하신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성종 때에 조 위(曺偉)가 승지가 되었는데 글을 잘하자 성종께서 승지 혼자 가서 제술을 시험하더라도 잘못 뽑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성균관에 보내어 식마론도(息馬論道 말을 쉬게 하고 도를 논함) 라는 글제의 부(賦)를 짖게 하였는데 생원 황 계옥이 지은 것을 뽑아 들이니, 성종께서 보고 탄복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전조(前朝)에 목은(牧隱 이색의 호)과 포은(圃隱 정 몽주의 호) 같은 문장의 선비가 배출되어 여풍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세조 때에도 문학의 선비가 많았습니다. 폐조(廢朝 연산군 때를 가리킴)에 이르러 거의 다 제거 되었다가 반정(反正)한 뒤에는 귀양 갔던 사람들이 조정에 도로 들어 왔으므로 인재가 조금 떨쳤습니다. 근래에는 인재가 아주 모자라서 선비가 스승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하고 스승도 가르칠 마음이 없으니, 반드시 경학이 정통한자를 가려서 사장(師長)의 직책을 주고 조금이라도 공효가 있으면 이에 따라 천전(遷轉)하여 사예(司藝)가 되어서 사성(司成)으로 옮기고, 사성에서 대사성이 되게 한다면 반드시 흥기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 입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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