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에서 속리산은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것이다. 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속리산 동쪽의 증항(甑項) 근처 또는 우복동 인근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또 승지라 여긴곳에 정착을 하여 후대로 이어오면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보은 구병리 입구에서 보는 속리산
속리산 십승지로 지목한 곳은 보은군 우복동인 지금의 내속리면 구병리 일대와
상주 화북면 우복동천 일원의 우복동, 용유리 일대, 그리고
문경 농암면 청화산 아래 내서리, 광증마을 일원도 우복동 십승지로 지목된다.
오늘은 속리산 동쪽기슭 지역인 우복동을 차례대로 찾아나선다.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마을 솔밭입구
실제로 고려 공민왕은 황건적의 난을 피해 법주사로 도망왔다가
홍건적 소탕뒤에도 연이어 일어난 반란때문에 환도하지 못하고 몸을 숨겼다고 하며,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고려 공민왕과 조선 세조도 거쳐간 속리산이다.
하물며 산이 얼마나 깊었으면 이름까지도 속세와 떨어지는 속리산이라 했을까 싶다.
마을입구 솔밭앞에 있는 구병리 마을 유래비에는
~ "속리산은 아비산이요, 구병산은 어미산이라하니 구병의 품속에
아늑히 자리잡고, 아비산 속리를 바라보는 우리 마을의 터전은 비기(秘記)에
삼재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전국 십승지지의 하나라는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은
우리마을이 터잡은 멍에목이와 돌목이를 말하며 지형이 소의 자궁과 같다하여
우복동으로 일컬어지는 길지중에 길지요, 명당중의 명당이다."~ 라고 적혀있다.
곱게핀 가을 코스모스
산중의 산중이라 벌써(2022.9.21) 서리를 만난 고추가 힘없이 시들어 버렸다
양지쪽에 있는 장미는 예쁘게 피어있다
인근의 비룡 저수지
전국의 많은 비에도 이곳 내륙은 목이 마르다
수령 600여년의 서원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2호)
보은 서원리 소나무를 보고 다시 상주 화북 우복동으로
화북면 용유리 계곡(우복동천)
화북면 우복동도(牛服同圖) 석비와 옥용자(玉龍子) 시비
청화산 남쪽에 우복동 열렸으니
속리산 연봉속에 삶의 터전 이루었네.
구름위에 솟은 보필봉은 병풍같이 앞에섰고
하늘에 꽃인 귀인봉은 뒷자리에 서있고나.
수정같이 맑은 물은 흘러가도 정은 떠나지 않으니
망아지 고개로 좋은 운세 도라온다.
들판에 정기모여 몇 천년인가
강선대 홀을 잡은듯 안산밖에 들려있네.
용유계곡 건너 광정(光亭)마을
행정구역은 문경 농암면이지만 용유계곡(우복동천)을 사이에 두고
상주 화북 용유리와 접한 우복동길의 광증마을이다.
청화산 우복지
청화정(靑華亭)
우복동에서 보는 속리산과 용유계곡
속리산 시비공원
이중환(李重煥,168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있는 용유동(鏞遊洞) 부분 석비
병천(甁泉)
송명흠(宋明欽,1705~1768) ~조선후기 참의, 부호군, 찬선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병천에서
길따라 가다보니 곳곳이 도원경이라
느긋이 맘춰서서 맑은 물결 바라보니
높은산 늙지않아 구름안개 쌓여있고.
유수가 쉼이 없듯 세월역시 흘러가네.
산골길 이끼끼어 봄날도 고요하고
돌문에 솔화솟아 해마저 멈추었네.
평생에 게으런 낚시꾼 물속에 드리우니
골안에 노는고기 모두 벗 낯 악었네.
옥량동(玉樑洞)
박건중(朴建中,1766~1841) ~조선후기 비요촬약조해, 초종례요람 등을 저술한 학자.
옥량동
날씨 따뜻하니 산새들 지저귀고
동풍이 불어 봄은 깊어만 가네.
벗과 함께 돌길 노닐며
좋은 술 꽃내음에 취기 돋는다.
옥 대들보 눈썹처럼 아름답고
옥구슬 물보라 석벽에 부딪치는데
선경에 들어 세월을 잊고
마음씻어 신선하니 구름탄 신선같구나.
속리산 시비공원에는 산책로 따라 수십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용유2리 마을
용유계곡 비경
수령 400여년의 소나무(보호수)
우복동천의 거울같이 맑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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