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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성주 죽헌 최항경의 오암서원과 주변 사적들

by 안천 조각환 2022. 11. 4.

오암서원(鰲巖書院)은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의 문인이었던

죽헌 최항경(崔恒慶 1560~1638)과 그의 두 아들 최은, 최린 등 삼부자를 배향한 서원이다.

최항경은 160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암정사(鰲巖精舍)를 지어 학문에만 힘썼다고 한다.

 

오암서원 전경

 

죽헌선생 사후 90여년이 지난 1730년(영조 6)에 운암서원(雲巖書院)을 지어

최항경의 제사를 지냈으나 1741년(인조 17) 서원훼철령으로 사라졌고,

1781년 다시 오암서원을 지어 배향했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숭덕재사(崇德齋舍)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1985년 후손들이 대강당과 광영루(光影樓)를 지었고, 2007년 효덕사(孝德祠)를

신축하고 대강당과 숭덕재사를 개축하여 오암서원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오암서원(鰲巖書院) 문주석(門柱石)

 

오암서원이 들어선 자리는 죽헌 최항경선생이 은거해 살던 땅이고,

이곳이 무흘구곡 아래 있고 백척의 오암 위에 있어 흰돌과 냇물이 잇닿아 있으며,

봉황이 나는 듯한 바위라 죽헌이 이곳을 가장 사랑한 곳이라 한다.

 

오암서원

 

죽헌 최항경(崔恒慶 1560~1638)은 본관이 영천이고

자는 덕구(德久)이며 호는 죽헌(竹軒)이고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최항경은 열여섯 살 되던해인 1576년(선조 8)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던

아버지 최정(崔淨)을 따라 성묘차 성주 남은리에 왔다가 아버지가 객사하게되자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하게되었으며, 모부인(母夫人,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게 되었다.

죽헌은 이곳 법산(法山)자락에 집을 지어 살게되면서 법산마을의 입향조가 되었다.

 

오암서원 정문인 광영루(光影樓)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 자식의 도리에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성실한 자세로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한강 정구에게 수하(水下)의 장로(長老)로 불리는 등 깊은 신뢰를 받았다.

그의 인품과 학문적 깊이는 대를 이어 최은과 최린 형제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며,

훗날 삼부자는 수하삼현(水下三賢)으로 칭해졌다.

 

오암서원 강당

 

삼부자의 학문과 덕행으로 죽헌종가는 명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법산에 터를 잡아 살아온 이래 자손이 번성하면서 수많은 문무(文武) 급제자와

유학자, 효행자가 나왔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한때는 백여호가 넘게 모여 사는 동성대촌으로 400여년을 이어온 법산마을은

법산 영천최씨 또는 법산 최씨라 할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강당 마루위의 오암서원 편액과 지난 봄 향사때의 집사 분정 명단

 

죽헌의 선조는 4대(고조부터 선친까지)에 이어서 백여년간 서울지역에서 살았으나

그 이전대인 9대조부터 5대조까지는 성주에서 살았으며 선대 묘소도 이곳에 있다.

 

오암서원 강당 중건 상량문 편액

 

오어서당 상량문(鰲巖書堂 上梁文)

 

오암정 상량문 원본

 

이 오암정상량문은 125년 전인 정유년(1897)에 의금부도사금의 이종기가 짓고,

최항경의 11대손인 최성해가 쓴 친필글씨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상량문은 의성김씨 사우당 종택(수륜리 윤동마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82호)

김기대 종손(전 경북도의원)이 소장하고 있는것으로 최근에 발견되었다.

상량문의 끝에 글을 지은이와 쓴이, 그리고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세재 정유중춘 후학 전의 이종기 근찬(歲在 丁酉仲秋 後學 全義 李種杞 謹撰)

십일대손 유학 성해 근서(十一代孫 幼學 性海 謹書)

정유년(1897년) 봄에 후학 전의 이종기 가 짓고

11대손 유학 성해가 쓰다

 

*이종기(李種杞,1837~1902)의 자는 기여(器汝), 호는 만구(晩求),다원거사(茶園居士),

본관은 전의(全義), 거주지는 다산(茶山)으로 19세기 말 영남의 퇴계학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1837년 11월 28일, 성주 다산면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오어서당기 (청주 정재교 근서,淸州 鄭在敎 謹書)

 

오암서원 강당

 

효덕사(사당) 전경

 

효덕사 출입문인 신문(孝德祠 神門)

 

효덕사(孝德祠) 사당

 

효덕사에는 죽헌 최항경(崔恒慶 1560~1638)과

그의 두 아들 최은, 최린 등 삼부자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광영루와 멀리 법산마을앞 들녘

 

경성재와 오암계정 출입문

 

경성재(敬誠齋)와 오암계정(鰲巖溪亭)

 

서원앞의 삼현각(三賢閣)

 

삼현각은 죽헌 최항경과 그의 두아들인 학봉 (鶴峯) 최은,

매와(梅窩) 최린 삼부자의 명문장(名文章)을 기리기 위한 누각이다.

 

누각 마루위의 삼현각(參賢閣) 편액

 

오암계정(鰲巖溪亭) 편액

 

오암서원 삼현각 상량문 편액

 

단기 4346년(서기 2013년) 여름 진양 강희대 근송(晉陽 姜熙大 謹頌)

 

죽헌 최선생 유허비(竹軒 崔先生 遺墟碑)

 

오암서원 원내에 세워져 있는 최효부 안동권씨 려표비는

불치병에 걸린 시아버지(최영우)에게 행한 며느리 안동권씨(최련의 부인)의

살신성효를 기리는 유명한 효부비이다.

 

최 효부 안동권씨 려표비(崔 孝婦 安東權氏 閭表碑)

 

영천최씨의 집성촌 가운데 전국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성주군 수륜면 법산마을은

성주군수의 효부상을 비롯해 대구 보화원의 효행 표창 등 현재 효부상을 받은

사람이 8명이나 있어서 성주군에서 "효마을 법산" 이라고 명명했다.

 

법산마을 숭효원(崇孝苑)

 

최효부 안동권씨의 손자인 고 최창곤(전 미정화학 회장, 도산서원 원장)씨는

효부 할머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할머니가 생전에 살던 법산마을 집터에  

 사재 20여억 원을 들여 숭효원을 건립하고 중심에  효부의 집을 지어

효 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당시 영남 일원의 선비와 학자들이 찬사의 글을 앞다투어 보내와

"최효부 안동권씨 실기록" 이라는 문집도 편찬한바 있다.

 

자운문

 

상효당(尙孝堂)

 

모헌정(慕軒亭)

 

최효부 안동권씨 려표비

 

모헌공(최창곤) 영상 추모비

 

백서원(百瑞苑)

 

백서원의 석조각상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은 오암서원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으며, 죽헌 최항경이

스승인 한강 정구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세운 서원이다.

 

 

회연서원 강당

 

회연서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선생과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참고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선생의 본관은 청주, 자(字)는 도가(道可), 가보(可父).

호는 한강(寒岡)·회연야인(檜淵野人)이며, 조선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작가, 서예가, 의학자이자 임진왜란기의 의병장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대가천 봉비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선생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무백(茂伯)이고, 호는 석담(石)이며,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160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 사간원 정언, 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회연서원에 제향되었다.  

 

죽헌공은 1638년 5월 19일 79세에 별세한 후

1678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

죽헌공의 문집은 전란에 소실되고 잔질을 수습하여 4권 2책이 전하는데

이 문집은 공조판서 겸 도총관이던 응와 성산 이원조가 서문을 섰다.

 

응와 이원조의 만귀정(凝窩 李源祚의 晩歸亭)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1)는 1792년 성주의 한개마을에서 태어났다.

입재 정종로의 제자로 18세 때 중광문과에 급제했으며,

대사관,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벼슬을 하는 내내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전한다.

 

만귀정(晩歸亭)

 

경주부사로 재직하던 중 부당한 뇌물을 요구하는 암행어사 김세호의 청을 거절하자

앙갚음의 장계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59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귀는 "늦은 귀향이라는 뜻"으로 그는 정자를 짓고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늙었다. 벼슬길에 종적을 거두고 이 고요한 곳에서 몸을 쉬려 한다"

고 판서 응와 이선생흥학창선비(故 判書 凝窩 李先生 興學倡善碑)

 

학문진흥에 의지를 담은 철제로 주조된 흥학창선비의 내용은

 

학문은 하늘과 사람을 관통하고  /  덕업은 온 나라에 드러났도다.

우리의 유계를 창설하여  /  우리의 협속을 깨우쳤도다.

만년까지 절의지켜 장수 하였으며  /  즐거움을 인과 지에 부쳤도다.

고결하고 훌륭한 행실을  /  백세토록 그 덕을 우러르리

 

만귀정 앞 만산일폭루(萬産一瀑樓)

 

만귀정 오른편 벼랑위에 응와 이원조가 산수를 즐기던 "만산일폭루(萬産一瀑樓)"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결국은 하나의 이치로 귀결된다"는

"만수일리(萬殊一理)"의 철학을 담고 있다.

만귀정 앞 계곡

 

최씨의 기원은 신라 6부촌장중의 한 사람인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으로,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다고 설화가 전한다.

서기 32년(유리왕 9) 최씨로 성(姓)을 하사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鄭)씨의 조상으로도 되어있으며

진주 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가야산 동쪽 만수동 십승지지의 마수폭포(죽전폭포)

아마도 죽헌 최항경, 응와 이원조도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으리라. 

 

"경주 최씨 상계 세보"에 의하면, 최치원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3대손으로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린 본관으로 개성,삭녕,동주와 전주 최씨의 군옥파(群玉派)가 있고,

그 외에는 최치원의 자손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폭포앞 기암괴석

 

최씨(崔氏)의 본관은 문헌에 대략 30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거의가 후손들의 거주 지명을 나타내는 것일 뿐, 그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후손들이 현존하는 성씨는 30여 본에 지나지 않는다.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대부분 최씨의 분파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마수폭포앞 기암괴석 위의 죽전대(竹田坮) 암각글씨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은 법산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16대조이며,

전주 최씨(全州崔氏) 시조 최균(崔均)의 10세손으로, 고려중엽 의종∼명종때에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三重大匡 神號衛 上將軍)을 지냈고, 나라에 유공하여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책봉됨으로써 영천에 식읍을 받아 세거하였다.

연산(燃山)은 영천(永川)의 옛 이름이어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시조공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 송현에 있다.

 

가야산 마수(만수동)계곡의 가을

 

영천최씨는 고려시대의 대문벌 이었으며, 조선조에는 학자 문장가(文章家)와

학덕(學德)으로 추앙된 인물이 많았는데, 특히 7世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은

왜구(倭寇) 침범 격퇴용 화포제작에 성공하여 손수 제작한 화포전함으로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전멸시킴으로써 세계 해전사상 최초의 함포전으로 서양보다 200년을 앞선다.

성주출신 중 영천최씨 근현대 인물로는 초대 서울대학교총장을 역임한 최규동선생과

서울시교육감과 경기대학 교수을 지내고 한국교육삼락회 총연합회장으로 활약한

최열곤 박사, 영진전문대학 최달곤 학장, 최경수 조달청장, 최갑동 장군 등이 있으며,

오암서원 효덕사와 권효부기념각인 숭효원을 건립한 29世 최창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