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의 모악산(母岳山) 금산사는 백제 30대 무왕 1년(600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국보 1점과 보물이 9점이나 있고, 애기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금산사를 찾는다.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신 금산사는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라 한다.
깊어가는 가을속의 금산사
고려시대 왕사였던 혜덕(慧德)은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때 석련대(石蓮臺)· 오층석탑· 노주(露柱) 등 중요석물을 만든것으로 보고있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1601년 수문(守文)의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고종 때에는 총섭(摠攝,주지)으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 대장전(大藏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 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1975년에 고평용이 건립)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僧統) 도생(導生),
원나라 왕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해원(海圓)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處英)과
서산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던 태능(太能), 편양파(鞭羊派)의 후계자인 남악·태우(泰宇)가 있다.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다.
최근에 월주(月珠)가 주지로 취임한 이래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普濟樓)·
미륵전· 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승당(僧堂)·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였다.
금산사 계곡
중요 문화재로는1962년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김제 금산사 노주, 금산사 석련대,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금산사 오층석탑, 금산사 금강계단,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금산사 당간지주,
1985년 보물로 지정된 금산사 석등, 금산사 대장전 등 9점이 있다.
해탈교
해탈교
금강문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천왕문
금산사 당간지주(보물 제28호)
깃발을 "당"이라 하고 깃발을 매는 긴 장대를 "간"이라 한다.
이러한 긴 장대를 지탱해주는 돌기둥이 "지주"역할을 하기 때문애 "당간지주"라한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신성한 영역을 나타내는 깃발을 걸 때 주로 사용한다
성보박물관(1999년 건립)
보제루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서
법요(法要:법회의식)와 강설당(講說堂)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적광전과 금강계단, 미륵전
대적광전과 오층석탑
범종각(1939년 건축)
대장전
금산사 대장전(金山寺 大藏殿, 보물 제827호)과 석등(보물 제929호)
대장전은 보물 제827호로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전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아난(阿難)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등(石燈, 보물 제828호)과 노주(露柱, 보물 제22호)
명부전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다.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로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미륵전과 석탑
금산사 육각 다층 석탑(보물 제27호)
이 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모양에서
고려시대의 장식이 화려한 양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은 금산사 경내에 있는 3층 규모의 불전으로,
신라 법상종시대에 미륵본존을 봉안한 불전으로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이다.
진표율사가 통일신라 764년(경덕왕 23)에 거대한 미륵불을 만든 후
766년(혜공왕 2)에 연못을 참숯으로 메우고 세운것이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3개월 동안 감금된 곳이기도 하다.
미륵전 내부
중앙은 미륵부처님, 좌측이 법화림 보살, 우측은 대묘상 보살이다.
좌대는 청동 연화대로써 오랜 세월로 인해 연꿏문형이 탈락되어 솥형태로 변형되었다.
당시의 불상은 정유재란 때(1597년) 건물과 함께 소실된 후,
1635년(조선 인조 13) 수문대사가 복원 하였다.
미륵전 건물의 규모는 총 높이가 20m 가량의 통층 3층으로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79평,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50평,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약 28평 가량 되며, 기둥은 원형 그대로 이용했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오층석탑과 석조계단이 있는 곳
송대향각(送大香閣)
적멸보궁과 오층석탑
적멸보궁(1998년 건립) 내부
적별보궁 안에서 유리창으로 석가여래의 진신사리탑을 보며 기도를 한다.
왼쪽은 석가여래 진신사리탑, 오른쪽은 적멸보궁 건물
금산사 오층석탑(보물 제25호)
이 오층석탑은 고려 경종4년(979년)에서 성종 원년(982년)에 걸쳐 새워졌다.
본래는 9층 이었으나 현재는 5층 석탑으로 남아있다.
당시 석탑의 윗 기단 사리공에 정광여래 사리 2과, 석가여래 진신사리 5과,
청동불상 등을 모셨는데, 이 후 정광여래 사리는 분과하여 3과가 되었고,
사리를 제외한 유물들은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방등계단과 오층석탑
위는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보물 제26호), 아래는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23호)
위의 1)금산사 방등계단은 통일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진표율사가
최초로 설치하였고, 고려 혜덕왕사 소현이 중수하였으며 보물 제26호이다.
석조부도의 중앙에 종 모양의 탑이 있는데 상부에 9룡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계의식이 행해졌으며 미륵 십선계를 주었다고 한다.
아래의 2)석련대(石蓮臺)는 10세기 중엽 이전에 조각된것으로 보물 제23호이다.
석련대란 석조연화대좌의 준말인데, 규모도 크고 세부 조각 수법에서도 뛰어나다.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나 세부의 조각 수법이 마치 많은 부재를 사용한 듯하고,
상·중·하대의 구성이 정연하며 화려하다.
나한전(오른쪽 건물)과 조사전(왼쪽 건물)
나한전은 방등계단(方等戒壇)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적멸보궁쪽에서 보는 미륵전
우물(샘터)
미륵전과 대적광전
원통전
원통전(圓通殿)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관음전이라고도 하지만
모든 곳에 두루 임하고 관여하는 원융통(圓融通)을 강조해 원통전이라고 한다.
향적당 앞
느티나무와 당간지주
모악산 금산사 계곡의 화려한 단풍
깊어가는 가을
금산사를 한바퀴 돌고 일주문에 서서
일주문
기둥이 한줄로 서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을 일직선으로 세운것은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세속의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오직 진리에 귀의하는
한 마음으로 들어온다는 일심(一心)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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