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전.충청권

아산 만전당 홍가신(洪可臣) 기념관

by 안천 조각환 2022. 12. 28.

홍가신 기념관은 아산 염치읍에 있는 홍가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간옹(艮翁)이며, 허엽, 민순,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기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홍가신 기념관(전면)

 

홍가신은 1596년(선조29)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04년 청난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홍가신 청난공신 교서 및 관련고문서는 보물 제1815호로 지정(2014.1.20)되었으며,

홍가신 초상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405호이다.

2022년 12월말 홍가신의 후손 홍익선(洪益善)옹의 안내를 받아 기념관을 둘러본다.

 

홍가신 기념관(측후면)

 

기념관 입구의 16자 상소문

 

16자 상소문은 홍가신선생이 사직 후 치병한지 1년 후인 1607년 봄에

임금이 공신의 중삭연(仲朔宴)과 상수연(上壽宴)을 베풀어 선생을 불렀으나

병으로 참석치 못하고 잠규(潛規) 16자 상소를 올려 금잠(金潛)의 축하를 하였다고 한다.

 

만전당 홍가신 초상(영정)

 

기념관 내부를 시계방향으로 둘러본다

 

홍가신의 강촌모경(江村暮景)  ~ 강촌의 저녁풍경

 

강가의 나무 울창한 저 멀리 /  강수원천천(江樹遠芊芊)

강 마을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  강촌생모연(江村生暮煙)

고기잡는 어부가 홀로 낚싯대를 거두는데  /  어인독파조(漁人獨罷釣)

   밝은 달빛만 빈배에 가득하누나.  /  명월만공선(明月滿空船)

 

선생의 일대기 요약과 유품들 전시

 

제향 모형도

 

요여

요여(腰輿)란 영여(靈輿)라고도 하는데 상여가 묘지로 향할 때

맨 앞에 명정(銘旌)이 서고 다음에 공포(功布), 그리고 요여와 상여순으로

행렬이 이루어지며,  묘역이 끝나면 혼백 또는 사진을 모시고 온다.

이 요여는 홍가신선생 상례 때인 1615년에 직접 사용한 것으로  400여년이 넘었다.

 

옥류암(玉溜庵) 편액

 

이 옥류암 편액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2016년)된 것이다.

옥류암은 홍가신(洪可臣)선생의 손자인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1595~1656)이 ​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임금이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두곡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며 지은 정자 이름이다.

옥류암이란 "옥 같은 깨끗함이 머물러 사는 초당"이라는 의미이다.

 

남양홍씨 역사적인물 동영상

 

남양 홍씨는 조선시대에 문묘 종사 대현 배출은 못했지만 총 2명의 종묘 배향공신을 배출했다.

충정공(忠貞公)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응(洪應, 1428~1492)은 좌의정에 올라

성종의 배향공신이 되었으며,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은

인종 때 영의정을 지내 배향공신에 올랐다.
이 외에도 총 329명(당홍 206명, 토홍 12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그중 당홍에서는 상신(相臣) 8명, 대제학(大提學) 3명, 왕비(王妃) 1명(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청백리(淸白吏)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명을 배출하였다.

 

홍가신 가족 묘역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나라에서 귀화한 홍천하를 시조로하고 홍은열을 중시조로 하는 당홍계(唐洪系),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인 토홍계(土洪系)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인구수는 당홍계는 38만여명으로 전국 22위, 토홍계는 3만여명으로 전국 176위이다.

당홍계의 근세인물은 홍기표,홍두표,홍일표,홍장표,홍준표,홍경민,홍성우 등이 있고

토홍계의 근세인물은 홍난파,홍사덕,홍수길,홍수철,홍수환,홍윤화,홍의락 등이 있다. 

만전당 홍가신과 두곡 홍우정은 남양홍씨 토홍계이다.

 

홍가신 묘소

 

홍가신 묘소(바로 앞)

 

새로 세운 묘비(왼쪽)와 옛날 묘비(오른쪽)

 

숭정대부 영원군 치사 홍공가신지묘, 정경부인 재녕이씨부

(崇政大夫 寧原君 致仕 洪公可臣之墓, 貞敬夫人 載寧李氏祔)

 

홍가신 묘소와 전망

 

연못과 사당

 

사당 신문(神門)

 

만전당(晩全堂) 사당 건물

 

사당의 만전당(晩全堂) 편액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이다. 

주지번(?~1624))은 당시 명(明)나라에서 학사의 문장 세 사람을 꼽을 때,

초굉(焦竑)· 황휘(黃輝) 등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는 1605년 11월에 황태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한림원수찬 주지번을 정사(正使)로, 예과좌급사(禮科左給事) 양유년(梁有年)을 부사(副使)로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주지번 등은 1606년 4월 11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황제의 조서(詔書)와 칙유(勅諭)를 전달하였으며, 주지번은 당시까지 조선에 온

사신들과 달리 뇌물 등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하였다고 한다.

 

홍가신 신도비(각)

 

처음 홍씨가 탄생한 것은 중국 돈황 지역에 살고 있는 공공씨(共工氏)의 후손이

원수의 추격을 피해 (共)자에다 (水)자를 붙여 홍(洪)이라는 성씨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홍씨가 생겨난 것은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당나라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에 입국한 것에서 연유한다.

고구려에 들어온 홍천하가 연개소문이 일으킨 반란에 반대하며 다시 신라로 건너가

삼국통일 이후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홍씨가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기념관 관리동

 

남양 홍씨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남양 홍씨 당홍계(南陽 洪氏 唐洪系)와 고려시대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남양 홍씨 토홍계(南陽 洪氏 土洪系)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당홍계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홍천하 후손이고, 토홍계는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으로 일컬어 오며, 동성동본인 만큼, 한 집안으로 보아 통혼하지 않으며,

양 계통은 현재까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만전당홍가신 기념관 안내서

 

시조 홍천하(洪天河)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화성시 남양읍일대)으로 하고 있다.

 

위 : 1604년의 공신교서(보물 제1815호)

중간 : 홍은과 홍가신의 추증교지, 아래 : 홍가신 시호교지 등(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0호)

 

홍가신의 7자녀 분재기(分財記) 등 관련 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