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묘는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자락에 위치한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정유재란(丁酉再亂) 중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12월 중순 아산 본가에 운구되었고, 1599년 2월 11일에 발인하여 아산의 금성산 중턱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16년 뒤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으며, 부인 상주방씨와 합장묘이다.
아산 이충무공의 묘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으며 전서로 이순신과 부인이 묻혔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봉분 앞에는 이이명의 글을 새긴 묘비(墓碑)와 상석(床石)·동자석(童子石)·
문인석(文人石)·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석수(石獸) 등이 늘어서 있다.
봉분의 뒤쪽으로는 곡장을 둘렀으며, 사적 제112호로 지정되어있다.
묘비의 글씨는 1707년(숙종 31) 현충사(顯忠祠)가 사액 받을 당시에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에게 부탁하여 음기(陰記)로 새긴 것이다.
묘역입구의 신도비
묘역입구의 신도비는 1693년(숙종19)에 세워진 것이다.
묘역입구 신도비 바로 뒤로는 이충무공 후손들인 덕수이씨 충무공파의 묘역이 줄지어있다.
신도비각 오른쪽으로 난길이 이충무공 묘소로 가는 길이다.
이충무공 묘가 보이는 곳
이충무공 묘(바로 보이는 곳)와 신도비각(오른쪽 건물)
이충무공 묘
묘소로 오르는 계단
이 충무곻 묘
묘비(동일한 내용으로 구,신)
이 묘비는 좌의정을 증직 받은 후 1720년(숙종 46)에 새로 세워졌다고 한다.
증 효충장의 적충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贈 效忠仗義 迪毅協力 宣武功臣 大匡輔國)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 령.경연홍문관(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정헌(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豊府院君 行正憲)
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충청전라경상(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兼 忠淸全羅慶尙)
삼도통제사 시 충무 덕수이공순신 지묘(三道統制使 諡 忠武 德水李公舜臣 之墓)
배 정경부인 상주방씨 부좌(配 貞敬夫人尙州方氏 袝左)
묘 위에서 보는 묘역
묘와 신도비각
이 신도비는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짖고
영의정 김육(金堉)의 글씨로 새겨 1794년(정조18)에 세운것이다.
묘 아래의 사각 연못
덕수이씨 충무공파 후손들 묘역
덕수 이씨(德水 李氏)는 개성 개풍군 덕수리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덕수이씨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때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을 지냈으며,
1218년 거란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 거란을 방어하는 공을 세웠다.
이돈수의 아들 이양준(李陽俊)은 고려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되었다.
덕수이씨는 여러 분파가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파가
13세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를 파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와
12세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을 파조로 하는 충무공파(忠武公派)이다.
충무공파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유명한 무신 집안으로 자리잡았으며,
무과 급제자만 267명이고, 역대 삼군수군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이다.
문성공파는 문과 급제자 102명, 상신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이 나왔으며,
충무공파와는 달리 문성공파의 경우 남한에는 그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율곡 이이의 본가가 황해도 해주시 인근에 있었다가 남북 분단 당시 월남한 후손들만이
남한에 있기 때문이며, 2000년 통계기준으로 덕수이씨는 총 50, 486명정도이다.
충무재(덕수이씨 재실)
이충무공 묘역입구의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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