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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전.충청권

우암 송시열의 우암사적공원

by 안천 조각환 2023. 3. 15.

우암사적공원(尤菴史蹟公園)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선생이

학문을 익히고 제자를 가르쳤던 남간정사가 위치한 대전 동구 가양동에 있다.

대전시에서는 1991년부터 남간정사 인근의 53,120㎡(17,500여평)에 과거 건물들을

재건 또는 증축하는 등 문화유산공원을 조성하여 1998년 4월 17일 개장하였다.

 

우암사적공원

 

산수유가 활짝

 

매화도 활짝

 

남간정사(南澗精舍) 건물

 

연못과 남간정사

 

남간정사는 조선 숙종 때의 거유 송시열(宋時烈)이 강학하던

유서깊은 곳으로, 낮은 야산 기슭의 계곡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건립되었다.

 

기국정(杞菊亭)

 

기국정은 원래 우암 송시열이 소제동 소제방죽옆에 세웠던 건물이다.

선생은 소제에 연꽃을 심고 건물 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었는데

연꽃은 군자를, 국화는 세상을 피하며 사는 것을, 구기자는 가족의 단란함을 의미한다.

선생은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는데,

선비들이 국화와 구기자의 무성함을 보고 건물이름을 기국정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소제가 메워지면서 건물도 차츰 허물어지게 되자 1927년 이곳으로 옮겼다.

 

옛 사당 오르는 계단

 

옛 사당 건물

 

유물관

 

새로 조성한 사당 홍살문

 

외삼문인 명정문(明正門)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이다.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이직당(以直堂)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인함각

 

송시열은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으며,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 후 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명숙각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으며,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1차 예송문제로 남인 등과 여러차례 대립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한 데 이어 좌참찬에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짓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찬선이란 조선후기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 소속의 정3품 당상관 관직.

 

인함각 매화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입도문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제2차 예송이 일어나 실각당했다.

이듬해 덕원으로 유배된 후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남간사(南澗祠)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으로 분열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영정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심결재

 

견뢰재

 

사당 계단위에서 본 이직당과 심결재(좌) 견뢰재(우)

 

담장밖 연못앞의  덕포루(德布樓)

 

연못과 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