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선생 묘소(梅溪 曺偉先生 墓所)
제선생문은 조위 선생이 1503년 11월 26일(연산군 9년,당나라 홍치 16년)
유배지인 순천에서 돌아가셨을때, 같이 유배생활을 하던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예를 갗추어 상례를 치르면서 지은 제문이다.
제선생문(祭先生文)
한훤당 김굉필
유세차 홍치 16년 12월 12일, 순천에 유배된 김굉필은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매계 선생, 조 태허의 영정 앞에 제사를 올립니다.
생각건대, 공은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장자의 풍모를 지니셨으며,
아주 어릴 때부터 이름이나 명성이 나라 안에 자자하더니 회시에 선발되어
벼슬길에 올라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 번 군수로 나아가자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입었고, 충청, 전라도 감사를 맡아 임금의
덕화를 널리 펴자, 도민들은 아직도 그의 덕을 사모한다. 승정원의 도승지를 맡아
임금의 명령을 비롯한 나라의 중대한 언론을 담당하였고, 홍문관에 출입하며 여러 차례
왕의 전교와 비답을 담당하여 문장으로서 나라를 빛냈으며,
시(詩)도 으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한 호조참판에 발탁되어 높은 지위와 명성을
드날리니, 선비 집안에서 누군들 영예롭게 여기고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아아! 복이 없고 팔자가 사나워 중도에 허물을 얻어 관서(의주)로 귀양을 갔다가
남도(순천)에 이배되어 6년 되던 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 끝내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찌고 습한 남도 땅에서 고향 길 찾는 영구는 누구를 의탁하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넋도 외롭고 육신도 의지할 데가 없으니, 슬픔이 갑절이나 더하여 곡할 자식도 없고,
조문하는 친척도 없었다. 끝내 그의 후사가 끊겼으니, 하늘도 어찌 매정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군들 죽지 않으랴만 공은 더욱 가련하다. 내가 공을 본 것은 실로
청년시절부터였으며, 함께 귀양 갔다가 동시에 옮겨져서 함께 승평에 이배되어,
특별히 베풀어준 은혜가 두터워서 마치 동생과 형인 듯하였다.
서로 반갑게 맞아 강론할 때, 깊은 정으로 대하였다.
장차 의지하며 남은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으나, 나라 걱정에 병이 들어서 서로의
맹세가 어긋났다. 어찌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헤아리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갔단
말인가? 오호라! 나의 지극한 궁핍과 외로움이여,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고,
나서도 갈 곳이 없네, 외로운 몸으로 그림자나 돌아보며 탄식하게 생겼으니,
지금 이후의 세월은 누구와 더불어 보낸단 말인가? 다만 모시고 놀던 일을 생각하면 간과
쓸개를 도려낸 듯 아픈데, 하찮은 재물을 차려 놓고 슬픈 마음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술을 걸러서 정성을 아뢰니 늙은이의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아 아 슬프구나! 흠향하소서!
祭先生文
寒暄堂 金先生
維弘治十六年歲次癸亥十二月甲午朔十二日乙巳.付處人金宏弼,
謹以淸酌庶羞之莫,敬祭于故梅溪先生曺大虛之靈.唯公天資寬仁,
長者之風, 蜚英早歲,聲動海東, 擢登龍榜, 歷敭華秩,一佩郡符,
民蒙其澤,宣化兩道,人思其德,首居銀臺,久司喉舌,出入玉堂,
屢掌綸綍,文爲華國,詩稱冠冕,擢亞地官,位亦尊顯,士類家家,
孰不榮羡,吁嗟薄命,中道獲譴,謫西遷南,六閱署寒,一疾而逝,
竟不生還,瘴中旅櫬,誰托誰依,魂單骨孤,倍增悽悲,哭乞子女,
弔乏親賓,終絶其嗣,天維不仁,人誰不死,公更可憐,我之獲見,實自靑年,
偕謫同遷,共配昇平,特荷眷厚,分若弟兄,招邀講討,待以深情,將謂仰賴,
以度殘生,疾疹憂患,誓莫相捐,豈科於今,棄我而先,嗚呼余乎,窮獨之極,
言無聽者,出無所適,煢煢孑孑(경경혈혈),顧影咄咄,今後歲月,誰與消遣,
只思陪遊,肝膽若翦,來陳薄尊,詎盡哀誠,瀝酒告情,老淚先零,嗚呼哀哉,
尙饗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달성 현풍의 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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