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에서 2020년 8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 라는
제하에 3회로 나누어 게재한 내용을 사진 등을 추가하고
일부내용을 편집하여 7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울진 월송정
1467년(세조 10년), 울진 바닷가 갯바위에 한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년은 처음 보는 바다가 마냥 신기해서 물비늘 반짝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그런 소년을 또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동해바다
제법 시간이 흘러 무료해질 무렵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가 소년의 무릎 위에 얹힌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바다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질 않습니까.
볼 수 있을 때 마음껏 봐두고 싶습니다. ”소년은 바다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실은 어머니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율수재(聿修齋) ~ 매계구거(梅溪舊居,생가)
울진현령 조계문의 아들 조위(曺偉,1454~1503)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다.
대여섯 살 때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글을 배웠고, 글재주가 뛰어나 일곱 살에
이미 시를 지었다. 조계문(曺繼文)은 그런 아들을 잘 키워보려고 사촌형
조석문에게 조위를 부탁했다.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좌익삼등공신 창녕군,
이시애의 난 때 병마부총사로 출정해 공을 세운 적개일등공신,
성종 임금 즉위에도 공을 세운 좌리일등공신,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한 훈신. 그것이 조석문(曺錫文,1413~1477)의 이력이기 때문이었다.
매계구거, 율수재, 매계유허 편액 ~ 율수재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조석문은 영특한 조위를 무척 아꼈기에 조계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조위는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져 한양으로 올라갔고,
조석문 집에서 글공부를 하게 됐다. 그러나 조위는 어려서 헤어진 부모를
늘 그리워했고, 마음에 병이 나서 날로 야위어갔다.
울진 대왕소나무(금강송)
조석문은 그런 아이가 가여워서 잠시 부모님이 계시는 울진에
다녀오게 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네 아버지와 상의하였다.
이곳에도 훌륭한 학자는 많고 아버지도 계시니 얼마간 여기서 지내며
글공부를 하도록 해라.” 어머니가 말했다. 조위는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몸을 비틀어 어머니를 끌어안고 감사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밀양 김종직 생가 입구
4년 후인 1471년, 내려올 때 열네 살 소년이었던 조위는
열여덟 살 청년이 되어 경상도 함양으로 향했다.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매형 김종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성리학자로
이색에서 시작해 정몽주, 길재로 이어진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2) 생가
그 학문은 다시 김종직이 물려받았다. 김종직은 조위가 태어나기도 전인
1451년(문종 1년) 조위의 누나와 혼인했다.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들어가 수학한 후 1459년 식년문과 정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
교검, 박사, 예문관봉교, 감찰, 영남병마평사, 교리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늙은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고 함양군수에 부임해 있었다.
함양 학사루(學士樓)
함양군수 김종직은 낮엔 관아에서 직무를 보고 밤엔 문도들에게
성리학을 강해했는데, 유호인과 한백원 등이 그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조위도 대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모자라는 학문을 보충했다.
김종직은 조위를 가르쳐보고, “나와 태허(태허는 조위의 자)가 강론할 때
강하가 터진 것 같았으니, 태허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칭찬했다.
함양향교 명륜당(明倫堂)
조위는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제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며
대과를 준비해야 했기에, 떠나기 전에 지리산 유람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두류산(지리산) 유람을 제안했다.
"유두류록 유산기"에 "조태허(조위)가 관동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예기"를 읽고, 가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류산을 함께
유람할 것을 청하였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조망
“내 함양에 부임하여 보니 고개만 들어도 푸르게 우뚝 솟은 두류산이
눈에 들어오는데, 내 여태 부서(簿書: 관아문서)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한 번도 유람하지 못했구나. ”김종직은 제자이자
처남인 조위(曺偉)의 사마시 합격을 축하할 겸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유람을 계획했다. * (두류산은 지리산의 옛 이름이다)
지리산 천왕봉(1,915m)
그래서 조위는 임정숙, 유호인, 한백원 등과 함께 스승 김종직을 모시고
지리산 유람을 떠났으며, 길 안내는 덕봉사 해공(解空)스님이 맡았다.
천왕봉에서 보름달을 감상하고, 엄천과 화암을 지나 지장사에 들렀다.
구례 화엄사 흑매
환희대, 선열암, 향로봉, 미타봉, 영신사, 용유담, 등귀재 등 곳곳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왔다. 이때의 유람기는 김종직이 쓴 『유두류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성종임금의 총애를 받던 조위는
성종 대와 연산군 대에 활동한 문신이며 문장가였다.
경복궁 경회루
성종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죽자 세조비
정희대비 윤씨와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대신 지지로 형인 월산대군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등을 제치고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이후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대비의 섭정을 받았다.
경복궁 근정전
섭정기간 동안은 훈구세력이 집권했으나, 성종이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여, 성종은 원상제를 폐지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또 그 힘이 너무 세진 훈구척신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을 중용하고 신진사류를 대거 기용했다.
창덕궁 인정전
신진사류의 관계 진출이 현저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기득권층인
훈구세력은 위축됐다. 신진사류의 성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훈구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학풍이 진작되면서 김종직 주도의
사학이 크게 일었고 사학의 부흥은 관학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창덕궁 인정전 용상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성종임금은 대대적 문화부흥정책을 펼쳤다.
각종 서적을 편찬하고 문물과 제도를 개혁했다. 문화운동을 사학파가
주도하면서 훈구세력 중심의 관학파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으며,
뿐만 아니라 신진사류는 과전과 공신전, 별사전 등의 세습을 없애서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등 제도개혁도 주도했다.
창덕궁 선정전
훈구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발했고, 신진사류에 대한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정치상황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창덕궁 대조전
문화부흥은 문풍의 진작으로 이어져 문사들도 많이 배출됐다.
서거정과 김종직, 김시습, 정희량 등의 문사들이 문단을 빛낸 것도
이 시기였으며, 조위 또한 이 시대를 빛낸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선생 영정
조위는 시에도 뛰어나 "시로(詩老)"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으며, 『속국조보감』을 편찬한 홍귀달은 조위의 문장에 대해
“구름이 흐르며 무지개를 토하는 만장의 문장” 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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