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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매계 조위선생의 생애와 유적

by 안천 조각환 2023. 12. 3.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선생은 조선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과 더불어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475년 식년문과에 급제, 1479년 영안도경차관이 되었다.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검토관, 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갔으며

이후 지평, 문학, 응교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매계구거 율수재 (梅溪舊居 聿修齋)

 

1492년 동부승지, 도승지,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 시고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체포, 투옥된 후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이배)진 뒤 병으로 별세했다.

황간 송계서원, 금산 경렴서원, 순천 옥천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매계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매계 구거 (梅溪 舊居)

 

매계 구거(梅溪 舊居)인 율수재(聿修齋)는 김천 봉산면 봉계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삼간 기와집이다.

앞뜰에 아담한 연못이 있고 뒤는 낮은 산으로 둘러 쌓여

고즈넉한 옛 선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매계 조위선생(梅溪 偉先生,1454~1503)이

태어나서 공부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1686년에 지은 건물로, 가는 기둥으로 작은 건물을 짓고

정면에 매계구거(梅溪舊居)란 액자를 걸어 놓았다.

 

율수재 출입문인 도덕문(道德門)

 

율수재의 도덕문(道德門)은 매계선생이 사망한지 204년이 지난

1707년(숙종 34)에 나라에서 문장(文莊)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자 그 기념으로 세운 문이다.

시법(諡法)에서는 도덕박문으로 가로대 문(文)이라 하고,

행함이 바르고 뜻함이 온화하므로 가로대 장(莊)이라 하여

즉 "도덕박문왈문 이지화왈장(道德博文曰文 履志和曰莊)으로

줄여서 도덕문(道德門)이라 했다.

 

 

율수재기(聿修齋記)

1747년(영조,英祖 23) 정유(丁酉)년 정월(正月)에 개수(改修)하였다

이 금산(金山)의 매계당(梅溪堂)은 곧 문장(文莊) 조(曺)선생이 학문을 전력하던

유허(遺墟)로 그 수석이 그윽하고 깨끗하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노닐만한 곳이다.

내가 일찍이 한번 찾아가 놀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작년 가을에 선생의 후손(後孫) 박이 나에게 글을 보내어 

“나의 선조 문장공(先祖 文莊公)이 사화(史禍)를 입은 뒤로

매계당(梅溪堂)이 폐허(廢墟)된지 이미 백여년이 흘렀다.

 

율수재, 매계구거 등 편액

 

그때에 나의 조부 우졸당공(祖父 愚拙堂公, 휘 유,諱 逾)이 그곳에 움집을 짓고

글을 읽다가 불행이 일찍 별세하시고 집도 따라서 무너졌으므로

중부(仲父) 인제공(認齋公,휘 세룡, 諱 世龍)과 계부(季父) 경지재공(敬知齋公,

휘 세붕,諱 世鵬)이 뒤를 계승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내가 모든 제질(弟侄)과 의논하여 집을 지으니, 모두 아홉칸으로

중부(仲父)와 계부(季父) 두 분의 유지(遺志)를 어느 정도 이루어드린 셈이다.

 

율수재기, 율수재 중수기 편액

 

마침 선사(先師) 구암(久菴) 윤선생(尹鳳九)의 유상(遺像)이 이곳을 지나기에

당중(堂中)에 모신다음 사자(士子)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이어 제질(弟侄)과 마을의 수재(秀才)들을 거느려 날마다 학문을 강독(講論)하니

지금 감히 조여부(祖與父)의 유지(遺志)를 원만히 계승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자네는 이 기(記)를 써 달라. 고 하였다.

 

 

아! 사람이 그 조상의 어짊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불명(不明)이요, 

어짊을 알고도 천양(闡楊)하지 않는 자는 불인(不仁)이니

불명(不明)과 불인(不仁)은 불효(不孝)라 이른다.

그러므로 사전(思傳, 중용,中庸)에 효(孝)하는 자는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며

조상의 일을 잘 서술한다. 하였고 또 승전(曾傳, - 대학,大學)에

선대(先代)의 어진 이를 어질게,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긴다. 하였다.

 

 

지금 문장(文莊)선생의 도덕 문장(道德 文章)과 우졸당공(愚拙堂公)의

독지역학(篤志力學)은 다 세상의 준칙이 될 만하고 그대의 제부(諸父)는 

그 미적(美蹟)을 계승하였는데 그대가 또 여기에 전력,

일체 옛 모습대로 당(堂)을 중건(重建)한 다음 시경(詩經)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여 스스로 덕을 닦아야 한다. 는 뜻에 경경(競競-두려워하고

삼가는 것)하여 더욱 근면하고

그 자제들에게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으니,

이는 그 어진 이를 어질게,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의(義)를 알았고

또 그 뜻을 계승, 이를 서술하는 효(孝)를 다한 것이다.

 

 

내가 다행히 이 다음 병이 낳아 그곳에 가서 노닐게만 된다면

그곳에 있는 이들이 다 독서 수신(讀書 修身)하여 능히 그 가업을 계승하는가 하면

혼가(婚嫁), 상장(喪葬), 음식(飮食)에 예절이 맞고 읍양(揖讓), 진퇴(進退), 제사(祭祀)에

질서가 정연한 것을 구경하고 나서 그 교화(敎化)의 성취를 즐거워하며,

제군자(諸君子)의 말석에 앉아 향음주례(鄕飮酒禮)의 노래 소리를 듣고

헌수(獻酬,-술잔을 주고받는 것)하는 술을 마시고 나서 시(詩)를 지어

선생의 덕을 찬양하고 계산(溪山)의 절경(絶景)을 기록해도 기회는 늦지 않을 것이다.

아직 이만 쓰며 다음을 기다린다.

숭정기원(崇禎紀元) 이후 계사년 2월(癸巳年 二月, 1653년)에

안동 권진응(安東 權震應)이 쓰다

  

담장안의 율수재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사적비와 신도비

 

 매계 조위선생 생가 유허 표지석

율수재 경내에 있는 석비

 

오른쪽은 매계선생의 자형인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2)선생 사적비이고

왼쪽은 매계선생 동생인 적암 조신(適菴 曺伸,1454~1528)선생 신도비이다.

 

2023년 매계문학상과 매계백일장 시상식 장면

 

매계문학상과 매계 조위선생 학술발표회, 매계 백일장 등은 

김천 봉계에서 태어나 조선 성종조의 대학자이자 명문장가로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한시를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한 두시언해와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하는 등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매계 조위(曺偉, 1454~1503)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제정한  문화재행사이다.

 

 

김천시(문화원)가 주관하고 경상북도와 창녕조씨 김천문중에서 후원하는

문화재 행사들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개최하지 못한 해를 제외하고도

2023년 현재 매계 백일장은 44회째, 매계문학상은 7회째를 맞았으며

매계 조위선생 학술발표회도 수십년째 성황리에 이어져오고 있다. 

 

매계선생 영정과 친필시

 

매계선생 친필 시

 

유선의 깃발과 부절이 하늘에서 내리니  儒仙旄節下靑冥(유선모절하청명)

멀리 해를 잡고 지극한 정성 의지하네.   遠搏扶桑仗至誠(원박부상장지성)

만리에 고생하니 해가 솟은 듯 하였고   萬里間關廓日出(만리간관확일출)

천년에 즈음하여 황하의 맑음을 만났네.   千年際會値河淸(천년제회치하청)

 

수심으로 병든 비를 보고 나르는 솔개 떨어지는 듯 하였고    愁看瘴雨飛鳶阽(수간장우비연점)

기쁨으로 바람만난 돛대보고 춤추는 새가 가볍게 나는 듯 하네.   喜見風帆舞鷁輕(희견풍범무익경)

이번에 고향을 버리는 듯 가신 본래 뜻은   此去桑弧聊素者(차거상호료소자)

남자로서 다만 공명 때문이 아닐 것이로다.   男兒不獨爲功名(남아부독위공명)

 

순천 옥천가(玉川邊)의 조위선생이 지은 임청대기(석비)와 옥천서원,

 

매계 선생은 1493년(성종 24)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올랐고, 1494년 충청도 관찰사,

1495년 성균관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1498년 동지중추부사,경연특진관이 되었으며,

그 해 4월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8월 귀국길에 무오사화에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찬집한 죄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용만(지금의 의주)으로 

유배되었다가, 1500년(연산군 6)에 전남 순천으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서문밖 옥천가에 임청대(臨淸臺)를 세우고 학문과 도덕을 

강론하며 진솔회(眞率會)를 결성하여 이곳 선비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1년 조위선생이 병으로 사망하자 김굉필선생이 조사를 쓰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묘

 

묘소입구 마암재

 

한국가사문학관(담양)에 전시된 조위선생의 만분가(萬憤歌)

 

만분가는 조위(曺偉)선생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용만(지금의 의주)으로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유배지인 순천에서 지은 것으로, 귀양살이의 억울한 사연을

능란한 표현으로 절실하게 하소연 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가사이다.

 

그 줄거리를 살펴보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간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하계로 쫓겨난 것에 비유해 작품 전개의 틀을 마련했다.

몸이 억만 번 변해 늦은 봄날 두견의 넋이 되어 남산 배나무에 앉아

밤낮으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원통한 사연을 하소연했다.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옥황상제로 비유된 성종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쌓인 말을 싫도록 아뢰겠다고 했다.

결말에서는 산이 되고 돌이 되어 어디에 쌓여 있을 것이며,

비가 되고 물이 되어 어디로 울며 갈 것인가 하고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만분가는 2음보를 1구로 보면 129구의 장편가사이며 

주로 3·4조와 4·4조로 되어 있는데, 뒤에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안조환의 만언사 등을 낳게한 유배 가사의 효시로 알려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