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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남명 조식선생의 생애와 유적

by 안천 조각환 2023. 12. 1.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토동) 외가댁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조선 전기의 대학자로 이황과 더불어 경상도(경상좌·우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로,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삼가면 외토리(토동) 조식선생 생가

 

어릴때는 이곳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자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배웠으며, 30세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에 다시 고향인 삼가현의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

61세에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1572년 2월 8일 72세를 일기로 산천재에서 운명하였다.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

 

 30세부터 48세때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19년간 처가가 있는

이곳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김해 신산서원(산해정)

 

산해정(신산서원) 전경

 

합천 외토리 뇌용정(雷龍亭)

 

이곳은 남명 조식선생이 48세에 김해에서 다시 고향인

합천 삼가현의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61세 되던해인 1561년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거처하며 제자들을 길렀던 곳이다.

 

용암서원 전경

 

용암서원 강당

 

용암서원은 조식선생 사 후 그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처음 가회에 세웠던 회산서원을, 봉산에 향천서원으로 고쳐 설립했다가

1609년 용암서원 사액을 받으면서 그 명칭을 얻었다.

그 뒤 멸실 후 현재의 서원은 2002년에 시작하여 2007년에 복원하였다.

 

용암서원앞의 남명 조식선생 상(南冥 曺植先生 像) 

 

남명 조식선생(南冥 曺植先生)은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대학자이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정인홍,김우옹,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다.

 

 합천 황강가의 함벽루와 조식선생 시판(왼쪽), 남명 조식선생 상(오른쪽)

 

함벽루(涵碧樓)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1)

 

상비남곽자(喪非南郭子)  남곽자 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진 못해도

강수묘무지(江水渺無知)   강물만 멍하니 바라보누나.

욕학부운사(欲學浮雲事)   뜬구름의 일을 배우려고 해도

고풍유파지(高風猶破之)   오히려 고고한 바람이 흩어버리네.

 

*이 시는 남명 조식선생이 57~58세 때 벗(후배)인 보은현감(1553.6~1556)

동주 성제원(1506~1559)과 해인사를 구경하고 삼가면 외토리(조식의 고향)의

토골 뇌룡정으로 혼자 돌아가는 길에 함벽루에 올라 지었다고 한다.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南冥梅)

 

61세 되던해인 1561년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1572년 2월 8일 72세를 일기로 이곳 산천재에서 운명하였다.

사후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7)에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됐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산천재 주련(柱聯, 기둥에 세로로 쓴 글씨)

 

춘산저처무방초(春山底處无芳草)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猶餘)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산청 덕천서원

 

산청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1576년(선조 9)에 창건, 1609년(광해군 1)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위) 덕천서원 강당과 숭덕사(사당),  (아래) 서원 강당과 홍살문

 

남명 조식선생 기념관(산천재 뒤편)

 

남명 조식선생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로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으며,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기념관내 조식선생 사당(위)과 석상(아래)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산천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한국 선비문화연구원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은 부지면적이 24,600㎡(약 7,400여평),

건축면적은 8,679㎡(2,630평)으로, 연구연수동,숙박동,한옥체험실 등이 있다.

총 사업비는 19,224백만원(약 200억원)으로 국비와 지방비가 각각 50%이며

남명후손 출연금은 1백만원으로, 2008년 착공하여 2014년 완공하였으며

내부 전시시설등을 한 후 2016년 4월 1일 개관하였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에서 열린 제43회 남명 선비문화축제 장면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의

탄신 518주년(2019년)을 맞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산청 한국선비문화연구원에서 남명 선비문화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이틀간에 걸쳐 제전,공연,문화행사와 학술,전시,체험 등

다양한 부대행사로 열렸다.

 

축제의 이모저모

 

제례행사와 참관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