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역사속으로

역사속의 고적을 찾아서

by 안천 조각환 2023. 12. 10.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린 역사속의 고적을 찾아 본다.

100여년전의 모습과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비교해 보는것도 재미있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守禦將臺)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북문의 장대인데, 처음에는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1751년(영조 27)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라 하였다.

 

수원화성의 서문인 화서문(華西門)

 

서문은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으며, 보물 제403호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으로 통행의 중심이었다.

 

수원 화홍문(華紅門)

 

수원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으며, 왼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북수문 풍경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으로 처음에는 부친인 사도세자 묘인

현륭원(顯隆園)의 동쪽에 능을 만들었다가 훗날 왕후와 합장하여

서쪽으로 옮기면서 건릉(健陵)이라 하였다. 

 

화녕전(華寧展)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부왕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든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화성군 화산(花山)의 용주사(龍珠寺)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능사(陵寺)이다

 

북한산 중흥사(重興寺) 대웅전

 

중흥사는 숙종대에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을 관장하는 큰 사찰이 되었으나,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하지 못하고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있다.

 

파주 용미리 쌍미륵

 

파주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입상으로

조선 세조 11년(1465년)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보물 제93호이다.

 

개성 관아(관청)

 

조선시대에 개성부의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던 개성관아 문루이다.

위층에는 마루를, 아래층에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세웠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

 

개성 천마산 기슭에 있는 관음사 대웅전으로 고려초기에 창건되었다.

관음사는 주변 경관이 빼어나 "개성금강"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개성 선죽교

 

고려말 포은 정몽주가 피살된 곳으로 알려진 개성의 돌다리이다.

선죽교 앞의 비각에는 정몽주의 생애를 새긴 사적비가 있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돌다리이다.

영천 임고서원 앞에는 이 돌다리와 똑 같은 모조 선죽교를 세워놓았다.

 

논산 은진미륵

 

고려 초기의 미륵보살상으로 높이가 18.2m나 되는

고려시대 최대 석불입상으로, 보물 제218호이다.

 

충주 약사의 약사전과 삼층석탑

 

약사는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단호사(丹湖寺)의 옛 이름이다.

약사전 내에는 고려시대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이 봉안되어 있다.

 

수원 방화 수류정

 

함흥 향교

 

제일 앞의 건물은 정문 누각인 제월루(霽月樓)이고,

뒤에 명륜당과 대성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함흥 남대문

 

함흥성의 정문으로 남화문(南華門)으로도 불린 2층 누각이다.

왼쪽 건물인 종각의 범종은 현종 때 주조된 것이라 한다.

 

엣 대구거리

 

남한산성 수어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