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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종택,고택,생가

1조 7천억원의 기부왕 관정 이종환 생가

by 안천 조각환 2023. 12. 16.

관정(冠廷) 이종환(李鍾煥) 생가는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에 있다.

그는 "평생 거지 같이 벌어서 천사처럼 쓰겠다."고 말하며 살아왔고,

악착같이 벌어서 1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삼영그룹을 만들었으며

평생모은 1조 7천억원을 장학재단에 기부한 후 세상을 떠났다.

  

 

이종환 생가 후원의 관정헌(冠廷軒) 전경

 

이종환은 1923년 5월 의령에서 태어나 2023년 9월 13일 별세했다.

꼭 백수를 채우고 떠난 그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관정(冠廷)이다.

 마산고를 졸업한 후 1944년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1945년 태평양전쟁 시 일본 측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수료에 그쳤으며

이후 만주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사선을 넘나들다 종전을 맞아 귀국했다.

 

이종환 생가 대문채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정미소를 운영하던 중 6.25전쟁으로 나라가

황폐화되는것을 보고, 부국강병에 기여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1958년 플라스틱으로 컵· 바가지 등을 만들어 큰돈을 벌게되었고,

이후 포장용과 콘덴서용 필름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해 수출에도 기여했다.

이렇게 창업한 삼영화학공업(주)를 바탕으로 이후 삼영중공업(주) 등

10여개 계열사의 삼영그룹으로 발전시킨 창업 1세대요 명예회장이었다.

 

사랑채인 회경당(會敬堂)

 

"돈을 버는데는 천사처럼 할수 없어도 돈 쓰는데는 천사처럼 할란다"

2002년 4월 "일류 인재육성"을 목적으로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

설립하여 매년 1,000여명 안팎으로 150억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국내와 해외유학 장학생 13,000여 명에게 2,700억원 정도의

장학금을 전달했다고 하며,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사랑채에 걸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인 "관정관" 전경(2015.2.5 준공)

 

2012년에는 서울대에 600억원을 기부하여 전자도서관인

"관정관"을 건립하였으며, 이는 서울대 사상 최다 기부금액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가진 건 사람밖에 없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키워내자”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며

 "한국의 노벨상"을 만들고 싶어했고,

생전에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헛간채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은 2015년에 국내 최초 "1조원 장학재단"이 됐다.
최근까지도 남아있던 자투리 재산인 부동산·현금 등 300억 여원을 정리해

재단에 넣었다고 하며, 그가 기부한 금액은 그 사이 부동산 가치 등이

오르면서 총 1조7000억원이 됐다.

 

안채 입구

 

안채 입구의 관정 이종환 흉상

 

(중앙) "정도(正道)의 삶을 실천하라.

정도(正道)가 결국 승리한다"

관정 이종환

 

(오른쪽) 무한추구(無限追求) 하라.

도전(挑戰)없는 성공(成功)은 없다.

 

(왼쪽) 공부할 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안채

 

안채 대청 마루에 놓인 이종환의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2009년 3월 25일)

 

그는 평소 “돈을 벌 때는 천사처럼 벌 순 없지만, 쓸 때는 천사처럼 쓰련다”는 말을 했다.

"공수래(空手來), 만수유(滿手有), 공수거(空手去)"라는 말도 스스로 만들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가득 채운 뒤에 그것을 사회에 돌려주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 의미다.

 

안채앞 분재

 

그는 평소 자장면이나 된장찌개를 주로 먹으면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여
"자장면 할아버지"로도 불렸으며, 건강 비결은 절주와 규칙적인 생활이다.
60~70대부터는 모든 식사 때에 야채를 먼저 먹었고,

술은 하루에 와인 한 잔을 넘기지 않았으며, 90대 중반까지 골프를 즐겼으며

한 라운드를 자신의 나이 이하 타수로만 끝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안채앞의 분재들

 

그는 눈을 감기 전 가족과 지인들에게 “정도(正道)를 지켜라.
결국 정도가 이긴다. 재단을 영속되게 잘 운영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또 그는 “용서할 줄 아는 삶을 살라”는 말을 남겼다.

 

우물과 장독대

 

안채 오른쪽 건물 마루에서 보는 담너머 후원의 관정헌

 

생가와 후원 사잇문

 

후원의 분재 들

 

창덕궁 부용정을 재현했다는 관정헌의 이모저모

 

관정헌 전경

 

생가와 관정헌을 둘러보고 작은길 하나 사이인 생가 뒤편으로 향한다

 

생가 뒤편 재실인 추모재 입구의 석비들

 

(왼쪽) 사복시정 광주이공 상정후세장비(司僕寺正 廣州李公 尙靖后世葬碑)

(중간) 관정 송덕비(冠廷 頌德碑)

(오른쪽) 관정 이종환회장 송덕비(冠廷 李鍾煥會長 頌德碑)

 

*유독 규모가 큰 오른쪽의  송덕비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단어를 떠 올리게 한다

 

석비옆의 관정 송덕기

 

재실인 추모재(追慕齋) 정문

 

재실옆의 백수문(白壽門)

 

백수문 안의 건물들

 

관정 이종환생가 담장

 

의령군에서는 생전 이회장의 약속대로 이종환 회장의 뜻을 기리고,

"관정헌"과 한옥, 분재 등 수려한 경관과 이 회장의 유지가 깃든 공간을

널리 알리고자 "관정 이종환 생가"를 상시 개방하기로 헀다.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단 월요일은 제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