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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종택,고택,생가

명성황후 생가와 감고당

by 안천 조각환 2024. 1. 17.

명성황후는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생가는 1687년(숙종 13)에 처음 지어졌다.

본래 이 집은 숙종(肅宗)의 비(妃)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부친이자 명성황후의 6대 조부인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묘가

마을 뒷산에 있어 묘를 관리하는 묘막(墓幕)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여주의 능말이라 불리는 마을(능현동)에 남서향으로 지어졌다

 

명성황후 생가 행랑채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민유중 묘를 관리하던 직계 후손 민치록(閔致祿)과

한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 때(1858)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민자영(명성황후) 시절의 유일한 사진

 

민자영(명성황후의 어린 시절 이름)은 8살 때 아버지 민치록이 사망하자

친척집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던 감고당(感古堂)에서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어머니 한산 이씨와 함께 거주하였다.

 

생가 안채

 

명성황후는 열여섯 살에 왕비로 간택되어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민씨를 왕비로 천거한 사람은 바로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한데다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고,

명성황후가 낳은 첫아들은 선천적 기형으로 5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이것이 대원군이 보낸 산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등

이때부터 대원군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안채 내부

 

명성황후는 어린 시절 아버지 민치록에게 글을 배울 때

몇 번만 읽으면 바로 암송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 어떤 일이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고 하며, 독서를 좋아해 왕비 수업을

받는 중에도 소학, 효경, 여훈(女訓) 등을 밤새 읽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탄생한 별당채

 

명성황후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비이며,

구한말 국내외적 혼란기에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외세와의 대립 속에서

정치적 영역을 확대했고, 개국 정책으로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했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에는 청군의 개입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비운의 황후이다.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각

 

명성황후의 생가 옆에는 명성황후의 탄강(誕降)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4년(광무 8)에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여러 차례 보수, 개조, 중건(重建)되어 

묘막의 형태는 없고 건립 당시의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비(碑)

 

민유중 신도비(閔維重 神道碑)

 

민유중 신도비는 조선 숙종 33년(1707)에 묘로 가는 입구에 건립한 석비로

그의 둘째 아들 민진원이 전액을 썼으며, 큰아들인 민진후가 비문을 썼다.

귀부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명성황후 생가앞 연못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 기념관

 

기념관 입구 벽에 그려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초상화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과 명성황후 금보, 그리고 선이도

 

오얏꽃은 오얏이씨인 전주이씨(조선 왕족)의 상징이며

금보는 고종비 명성황후 책봉 금보(高宗妃 明成皇后 冊封 金寶)로

1897년(광무 1년)에 제작하였으며, 보문은 황후지보(皇后之寶)이다.

크기는 세로 10.6cm, 가로 10.7cm, 높이 9.2cm 이며 전시물은 모조제작품이다.

선이도는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부터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까지 조선 왕실의 왕과 왕비,

구성원, 능침의 위치까지 기록한 조선왕실의 계보도 이다.

 

명성황후 관련 궁중유물과 교지, 행사 모형 등

 

생가옆 민속촌의 연좌방아 

 

명성황후 생가옆의 감고당 정문과 행랑채

 

감고당(感古堂)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명성황후의 생가이자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묘소를 관리하면서 지키던

묘막으로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감고당 건물

 

본래 한성부 안국방(현 서울 종로구 안국동 37-1번지 일대)에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에 특별히 내려 준 건물과

1687년(숙종 13) 여주 능현리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정 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이 각각 건립되었다.

 

감고당 전경

 

그러나 안국동의 감고당은 후일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일부 시설물과 함께 편액도 현재의 여주 능현리로 옮겨졌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1976년 박정희 대통령 특별 지시로 복원공사가 시작,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다.

 

 

감고당 편액과 방 내부 물레 돌리는 모형

 

감고당 외부 전경

 

감고당옆 소원바위

 

명성황후 생가 주변풍경

 

대한제국 국기

 

대한제국은 대조선국의 대군주인 고종이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칭제건원하여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므로서 세워진 전제군주제 국가이자 한국의 마지막 군주국이다.

 

대한제국 국장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이전 조선국의

영문 국호이던 Korea에서 따 와 국제적으로 Empire of Korea로 불렸다.

따라서 이때부터 왕과 왕비의 칭호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로 변경되었으며,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경술 국치일)까지 12년 320일간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