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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밀양 영남루 국보로 승격되다

by 안천 조각환 2024. 1. 14.

문화재청에서는 2023년 12월 28일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2건의 대형누각(樓閣)인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했다.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된 감회가 남달라 밀양 영남루를 다시 찾아 젖어본다.

 

밀양 영남루 야경

 

국보 제344호로 지정된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또는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밀양 영남루 전경

 

조선조 초에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하였고,

1442년 경상도사 권기(權技)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하였다.

 

영남루

 

연산군 때에는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 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었으나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를 확장하면서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하였다.

 

영남루 건물 전면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영남루 건물 전면의 대형 편액

 

중앙에 걸린 영남루(嶺南樓)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이고

위(건물 왼쪽)의 교남명루(嶠南名樓)와 아래(우측)의 강좌웅부(江左雄府)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글씨이다.

 

누대에 올라서면 바로보이는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글씨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란 글씨는 밀양부사 이인재(李寅在)의 큰아들이 11살 때,

"계묘(癸卯,1843년) 초여름(初夏) 이증석(李增錫) 십일세서(十一歲書)",라 쓰고

영남루(嶺南樓)는 이인재의 둘째아들이 7살 때 썼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밀양 영남루(嶺南樓)에 대한 각종 고증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고, 빼어난 건축형식과 배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으며, 수많은 명사들이 탐방하고 교류하며 남긴

시문 등은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누대 안에 걸린 대형 편액 들

 

영남루(嶺南樓)말 그대로 영남에 있는 누각.

용금루(湧金樓)란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았다.

현창관(顯敞觀)은 멀리 바라본다, 널찍하게 드러나 보인다.

강성여화(江城如畵)는 강과 성이 마치 그림같다" 는 뜻

 

누대 처마에 걸린 시판(詩板) 

 

시인 묵객들이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만이 남아 있다.


차운 제영남루(次韻 題嶺南樓) 

                             ~삼우당 문익점( 三憂堂  文益漸,1331~1400)
                                        
신선이 사는곳에 있었던 골짜기를 (聞設神仙有洞天 / 문설신선유동천)
여섯자라가 머리에 이고 문득 앞에다 옮겼네. (六鰲頭載忽移前 / 육오두재홀이전)
갠 내의 방초에는 산들바람 불어대고 (晴川芳草好風裏 / 청천방초호풍리)
오리 한 마리 지는 노을 석양가를 날고 있네 (孤鶩落霞斜日邊 / 고목낭하사일변)

넓은 들판 말과 소는 나그네 길을 알려주고 (曠野馬牛分客路 / 광야마우분객로)
먼 마을 닭과 개는 연기속 주인을 맞이하네. (遠村鷄犬接人煙 / 원촌계견접인연)
별세계 풍경은 말로 다하기 어렵나니 (別區光景言難竟 / 별구광경언난경)
그림으로 그려다가 임금님께 드리고자. (畵取吾將獻御筵 / 화취오장헌어연)

 

 

비둘기와 해충들의 오염을 막으려고 망으로 덮여있는데다

오랜세월 먼지와 퇴색으로 시편액이 많이 누추해진 편이다. 

 

시판 중 목은 이색(1328~1396)의 당대 시판은 소실되고, 

1844년경 그의 16세손이자 영남루를 새로 지은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새겨 걸어놓은 시판이 있다.(중앙 왼쪽 시판)

 

영남루 아래 큰 강물 비켜 흐르고

가을 달과 봄바람이 태평스럽네.

문득 은빛 물고기가 눈앞에 가득하고

선비들 웃음소리 들리는 듯하네.

 

 

밀양 영남루 운에 차함(次密陽嶺南樓韻)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 1420~1488)

아름다운 남쪽 고을에 별천지가 있으니 (佳麗南州別有天 / 가려남주별유천)
풍류 높은 인걸들 연전의 일이 생각나네. (風流人傑想年前 / 풍류인걸상연전)
가까이 푸르게 둘러싼 삼면은 산이고 (靑回近郭山三面 / 청회근곽산삼면)
하얗게 뻗친 한쪽은 차가운 강물이라 (白抹寒汀水一邊 / 백말한정수일변)

 누각에 올라 한가한 세월만 깨달았고 (覺登臨閑日月 / 단각등림한일월)
시구를 가지고 운연에는 답하지는 못하는데 (未將詩句答雲煙 / 미장시구답운연)
과객이 너무 거칠어서 오히려 부끄럽네 (還慙過客麤豪甚 / 환참과객추호심)
자주 방자한 말로 좌중을 경동시킨 것이 (屢發狂言動四筵 / 누발광언동사연)

 

영남루에서 보는 동남쪽

 

영남루에서 차운하다(嶺南樓次韻)
                                        ~ 점필재 김종직(佔畢 金宗直,1431~ 1492)            

영남루에 오르니 때마침 늦봄이라 (登臨正値浴沂天 / 등임정치욕기천)
기둥에 기대서니 얼굴엔 선들바람 (灑面風生倚柱前 / 여면풍생의주전)
남방의 산천들은 바다로 향해가고 (南服山川輸海上 / 남복산천수해상)
팔창의 풍악 소리는 구름 가에 울린다 (八窓絲竹鬧雲邊 / 팔상사죽요운변)

들 소는 코를 들고 관선 나루를 건너가고 (野牛浮鼻橫官渡 / 야우부비횡관도)
백로는 새끼 데리고 저녁 연기를 가르누나. (巢鷺將雛割暝煙 / 소로장추할명연)
내 행차 적막하지 않음을 이제야 믿노니 (方信吾行不牢落 / 방신오행불뇌락)
어머니 뵐적마다 잔치자리 참여한 때문일세 (每因省母忝賓筵 / 매인성모첨빈연)

 

서편의 능파각(凌波閣) ~ "아름다운 여인의 가벼운 걸음걸이"라는 뜻

 

영남루 차운(嶺南樓 次韻)
                       ~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누각은 영해 하늘 우뚝이 솟아 있고 (樓觀危臨嶺海天 / 누관위임영해천)
나그네 좋은 시절 국화 앞에 찾아 왔도다 (客來佳節菊花前 / 객래가절국화전)
소상강 언덕인가 푸른 숲에 구름 걷히고 (雲收湘岸靑楓外 / 운수상안청풍외)
형산 남쪽 흰 기러기 물은 떨어지누나 (水落衡陽白雁邊 / 수락형양백안변)

비단 장막 광한전의 달을 싸고 도는데 (錦帳圍將廣寒月 / 금잔위장광한월)
옥퉁소 소리 태청(천상)의 연기 속에 들어가네 (玉簫吹入太淸烟 /옥소취입태청연)
평생에 진실로 시인의 흥이 있어 (平生儘有騷人興 / 펑생진유소인흥)
술두루미 앞에서 비단 자리에 춤추노라 (猶向尊前踏綺筵 / 유향존전답기연)

빈객(손님)들의 객사(숙소)로 사용했던 능파각

 

영남루 차운(嶺南樓 次韻)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 

돌아가는 구름이 비를 끌어 하늘강을 건느니 (歸雲拖雨渡江天 / 귀운타우도강천)
소나기가 비스듬히 보름달 앞으로 내린다 (銀竹橫絲月滿前 / 은죽횡사월만전)
어지러운 봉우리 너머 아지랑이 갠 어느곳 (何處亂峯晴靄外 / 하처남봉청애외)

몇 몇 마을 밥 짓는 불이 석양 곁에 난다 (幾村炊火夕陽邊 / 기촌취화석양변)

영웅호걸 세찼으나 공허한 자취만 남았고 (英豪滾滾空遺躅 / 영호곤곤공유탁)
좋은 모임 바삐 지나가 흩어지는 연기 같네 (佳會怱怱似散烟 / 가회총총사산연)
고향 생각을 늦도록 금할 수 없어서 (鄕思晩來禁不得 / 향사만래금부득)
밤 깊도록 걱정스레 앉았더니 달이 자리 찾아드네 (夜深愁坐月侵筵 / 야심수좌월침연)

 

영남루에서 보는 풍경

 

침류각(왼쪽)과 시내방향

 

누대에서 보는 침류각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낭(출입통제)

 

영남루 대에서 침류각으로 가는 계단식 낭

 

더 크게

 

침류각 앞에서

 

밀양강이 내려다 보이는 침류각

 

서편에서 보는 침류각과 영남루 건물

 

침류각(枕流閣) ~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

 

정유(丁酉,1957년) 가을 배수환(裴綉煥)이 쓴 침류각 글씨

 

영남루 출입문

 

능파각과 영남루 

 

동편에서 서편으로

 

밀양강에서 보는 영남루

 

수변의 가로등이 밝혀지고

 

 

밀양교의 야경

 

조명이 밝혀진 영남루

 

고려 중기의 천재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야경을 표현한 한시 영남사루(嶺南寺樓)를 남겼다.

 

영남사루(嶺南寺樓)  ~ 정지상(鄭知常)

 

시내 가득 달 밝은 밤이면 난간에 기대어 서고 (일계명월빙란야 / 一溪明月憑欄夜)

먼데서 맑은 바람 불어오는 날에는 발을 걷네. (만리청풍권박천 / 萬里淸風券箔天)

 

 

제영남사(題嶺南寺)  ~  임춘(林椿)


일찌기 원교산(圓嶠山) 푸른 물결  / 曾聞圓嶠臨蒼濤

큰 자라 위에 영롱한 누각 있었다는데,  / 樓閣玲瓏駕巨鼇

자라 기울고 바다 흔들리니 신선들이 놀라  / 鼇傾海動群仙駭

높다란 봉우리 하나 아득히 잃어버렸다지.  / 茫茫失去一峯高

 

그 봉우리 문득 여기  날아와서는 / 飛來怳惚移於斯

천고토록  옛 성 해자 앞에 웅크렸네.  / 磅礴千古當古壕 

하늘로 옥을 쌓듯 우뚝 솟아  / 突起連空如疊玉

백 길 깊이 맑은 못 위엔 푸른 오리 가로지르고.  / 百丈淸潭橫鴨綠 

 

 

골짜기 흐르는 냇물에 떠 있는 복사꽃 / 水泛桃花出洞中 

사람마다 선진의 풍속이 완연하네.  / 居人宛是秦餘俗 

푸른 산 그림자 속엔 두어 채 / 靑山影裏兩三家

수양버들 그늘 속엔 천만채. / 垂柳陰中千萬屋

 

해 저문 들녘에 돌아오는 소와 말들 / 日暮郊原牛馬歸

깊은 봄 물가에는 헤엄치는 물오리. /  春深洲渚鳧鷖浴 

노젓는 낚시배는 날으는 듯한데, / 漁舟之子棹如飛

몇 구비나 계곡을 누볐으리. / 溪岸不知盤幾曲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도읍 떠나온 손님 언제 다다랐는지 / 洛城遷客來何時

누각 위 멀리 천리 길 앞 보려 하네.  / 樓上欲窮千里目 

저 멀리  산인지 구름인지 한 빛인데  / 山耶雲耶遠一色

기러기 하늘 멀리 점점이 이어지네.  / 雁點長空行斷續

 

하늘가 저무는 빛이 참으로 창연하니  / 天涯晚色正蒼然

이내 고향 집 생각에 다시금 급한 마음. 其奈思家心更速  

이 누각에 다시 와 오르지 말걸 / 不用重來登此樓

풍광 좋은 이 곳에서 시름에 젖는 구나.  / 煙波好處使人愁 

 

 

 영남사 죽루에서  /  嶺南寺竹樓  ~  임춘(林椿)

 

영남사 풍광은 오흥(吳興)에서 으뜸인데  /   嶺南山水甲吳興

누각 위에 봄이 와 우연히 올라갔다네.  /   樓上春來偶一登

근심에 찡그린 눈썹 너머 아득한 산봉우리가 외로와  /   橫皺愁眉孤岫遠

넓게 펼쳐놨던 그 물결 맑고도 푸르구나.  /  平鋪淨練碧波澄

 

기둥 위 날아가는 구름은 상포( 湘浦)에 가 닿았고  /   雲飛畫棟歸湘浦

바람 따라 고깃배는 무릉(武陵)에 들어가네.  /  風送漁舟入武陵

시 읊고 붓 휘둘러 죽루 기둥에 남긴 뜻은  /  吟罷揮毫留粉壁

다시 들러 그 때의 나를 기억하고자 함이라네.  /   重遊聊欲記吾曾

 

밀양강둑에서 보는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 경내에 있는 천진궁

 

천진궁은 1652년(효종 3) 옛 밀양도호부 객사자리에 창건하였으며

단군이래 역대 왕조 즉 1)단군 2)부여 3)고구려 4)가야 5)고려 6)신라 7)백제

8)발해 9)조선 시조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춘추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밀성대군 지단(密城大君 之壇)

 

밀양(밀성)박씨 시조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沈)의 제단이다.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남인 밀성대군 박언침은 밀성박씨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 박언성(朴彦成)은 고령박씨, 3남 박언신(朴彦信)은 함양박씨,

4남 박언립(朴彦立)은 죽산박씨, 5남 박언창(朴彦昌)은 상주박씨,

6남 박언화(朴彦華)는 전주박씨, 7남 박언지(朴彦志)는 순천박씨,

8남 박언의(朴彦義)는 경주박씨, 9남 박교순은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는 등

왕자 9명이 모두 시조가 되었는데,

 

밀성박씨 시조 박언침의 묘소가 실전(잃어버림)되자

일제강점기에  박춘금이 밀성대군 제단을 영남루 경내 천진궁옆에 세웠다.

일부에서는 박춘금이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고 세운 일본식 무덤이기 때문에

영남루에서 철거해야한다는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후손들과의 다툼이 있다,

 

영남루 동편 기슭 무봉사(舞鳳寺)의 저녁예불 타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