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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종택,고택,생가

거창 동계종택(桐溪宗宅)과 반구헌(反求軒)

by 안천 조각환 2024. 3. 6.

거창 동계종택(居昌 桐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鄭蘊)이 태어난 집으로

1820년(순조20)에 중창(다시 지음)하였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거창 동계종택 사랑채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이며,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호는 문간(文簡) 이다.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칩이 지났는데도 설산인 금원산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사서·정언 등을 역임,

1614년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경상도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동계종택 솟을대문의 정려문(旌閭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자,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거창군 북상면

농상리(모리재)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사망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주 현절사, 제주 귤림서원, 함양 남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은거했던 농상리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모리재가 있다.

 

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 桐溪 鄭蘊之門)

숭정기원후 을묘오 사월 일(崇禎紀元後 乙卯五 四月 日) ~ 1915년 4월

 

정려문(旌閭門)은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표창으로

정온(鄭蘊)의 정려문은 충절의 공(功)으로 인조 임금이 내린 정려문이다

*숭정기원 후 다섯번째 을묘년으로 1915년이 된다.

 

사랑채앞의 매화나무

 

이 매화나무는 이름이 파매(坡梅)인데,

내용인즉 파주에 살던 용주 조경(龍州 趙絅,1586~1669)선생이

동계(桐溪정온(鄭蘊1569~1641)에게 선물한 매화나무라고 한다.

당시 나무는 20년뒤 고사하여, 현재는 그뒤 다시 심은 나무라고 한다.

*용주 조경선생의 본관은 한양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증 영의정,

행 판중추부사 겸 이조판서, 대제학으로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수령 350여년의 사랑채 누마루앞의 매화나무(동계매) ~ 아직 봉오리상태로 3월 말쯤 개화할듯 

 

동계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는 편액들

 

충신당(忠信堂)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매화옥(某華屋)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이며, 모와(某窩)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글씨인데, 모(某)와 매(梅)는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학암(鶴庵) 글씨는 미상이다

 

*충신당(忠信堂) 글씨는 200여 년 뒤에 역시 제주도로 귀양갔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에서 동계 정온 선생의 높은 학덕과 절의와

곧은 품성을 칭송하는 제주민들의 전래 이야기를 듣고 감동되어 귀양에서 돌아와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충신당(忠信堂)이란 현판을 적어주고 갔다고 한다.

 

*모와(某窩)는 의친왕 이강께서 2개월간 정온고택에서 머물며

항일독립의병을 양성하면서 내려준 현판이다.

모와(某窩)란 매화나무집이라는 뜻으로 충의와 지조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동계 정온의 집을 일컫는데, 동계선생이 말년에 덕유산 자락

모리(某里)에서 은거하다 죽은것과 관련된것으로, 구한말 승지를 지내고

이강과 친했던 정태균(장손)의 호를 모와(某窩)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사랑채 측면의 눈썹지붕

 

중문채

 

사랑채에서 중문채를 거쳐 안채로 들어 가는곳 

 

안채 앞마당과 사랑채 뒷편

 

안채

 

정온의 동계종택 종부는 경주 최부잣집의 맏따님으로

올해(2024년)로 100세가  되신다고 하는데, 이제 고령으로 정신이 맑지 못해

서울에 거주한다고 하며, 종부는 17살에 시집와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올해 83살의 노옹(老翁)으로 이집을 혼자 관리하고 있다.

참고로 종부의 여동생은 하회 류성룡종가의 종부라고 한다.

 

옆집인 반구헌에서 담너머로 보는 안채 측면

 

안채 뒷편과 사당 사이

 

옆집인 반구헌에서 담너머로 보는 동계종택 사당

 

동계종택 사당에는 정조 임금이 동계 선생의 지조를 높이 사

손수 지어보냈다는 제문()과 시(詩)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세월이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  ​/  일장산색벽차아(日長山色碧嵯峨)

천하에 떨친 정기 여전히 드높아라  /  종득건곤정기다(種得乾坤正氣多)  
북으로 가거나 남으로 오거나  그 의로움은 같으니  /  북거남래동일의(北去南來同一義)

 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  정금견석불회마(精金堅石不曾磨) 

 

곳간채

 

사잇문(집안)

 

고방채

 

대문채(안쪽)

 

사잇문(바깥쪽)

 

금원산 설경

 

동계종택 옆의 반구헌(反求軒) 대문

 

반구헌은 조선 헌종과 철종 때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野翁 鄭夔弼, 1800~1860) 선생이 기거하던 주택으로

반구헌이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2호이다.

 

반구헌 사랑채

 

야옹 선생은 목민관 재임 시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거창 안의 현감의 도움으로 반구헌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채(최근에 복원)

 

안채앞의 우물

 

사랑채 뒷편

 

반구헌 사랑채 측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 앞의 담장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동계종택이고,

멀리는 금원산이다

 

안에서 보는 반구헌 대문채

 

강동마을

 

동계종택과 반구헌 전경

 

강동마을의 동계종택(왼쪽)과 반구헌(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