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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삼우당 문익점의 도천서원과 사적지

by 안천 조각환 2024. 3. 13.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신안사재는 경남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고려 때의 문신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선생의 사적지이기도 하다.

1461(세조 7)에 나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소실되었다가 중건하였고, 

1787(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문익점 사적지(도천서원,신안사재,묘소) 입구의 문익점 신도비각

 

도천서원은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91(고종 28)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에 의해 노산정사(蘆山精舍)

이름으로 유지하다가 1975년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삼우당 문익점선생 사적지 표지석

 

삼우당 선생 사후 조선 태종(太宗)은 충선공(忠宣公)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는 정려(旌閭)를 세웠다.

세종(世宗)은 의정부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하였고,

세조(世祖)는 향사(享祀)를 세우고 도천사(道川祠)라고 사액(賜額)을 내리고

치제(致祭)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사우(祠宇)가 불탄 후 유림에서 중건하자,

정조(正祖)는 1787년에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 하였다.

 

문익점 신도비(神道碑)와 장남 시성숙공 부부 신단비(神壇碑)

 

(왼쪽) : 문익점선생 신도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로 지정)

(오른쪽) 위 : 신도비각,  중간: 신도비각 전경, 

오른쪽 아럐 : 문익점의 장남 시성숙공 남평문공 휘 중계, 배(配) 정부인 완산이씨 신단비

 

도천서원 홍살문

 

충선공 문익점(忠宣公 文益漸) 상(象)

 

문익점은 1329년(충숙왕 16년)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

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이색 등과 함께 공부했다.

 

도천서원 묘정비(廟庭碑)와 서원 전경

 

문익점은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무기나 화약 등과 같이 금수물품으로

 지정되어있어 발각되면 목숨까지도 위험한 목화씨를 돌아오는 길에

붓두껑속에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신안사재 전경

 

도천서원과 신안사재

 

향나무와 도천서원 일원 전경

 

도천서원 정문인 양덕문(養德門)

 

산청 도천서원(道川書院) 강당 건물

 

강당인 시경당(示敬堂) 대청마루

 

강당 왼쪽

 

강당 오른쪽

 

강당마루에 걸린 편액들

 

강당건물 방의 창살

 

강당 각 방의 편액

 

동재(유생 숙소)

 

서재(유생 숙소)

 

신안사재 건물

 

신안사재(新安思齋), 노산정사(蘆山精舍),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7

 

신안사재(新安思齋)1551년(명종 6)에 창건되어

문익점의 향사 때 제관(祭官)들의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804년(순조 4)에 중건한 것으로 팔작지붕이다.

 

 

신안사재 마루와 방

 

도천서원 담장

 

도천서원 건물과 바짝 붙어 처마가 거의 맞붙어있는 사당 출입문

 

삼우사(三憂祠), 편액은 이우사(貳憂祠) 인듯

 

삼우사(三憂祠)에는 문익점(文益漸)과 권 도(權 濤)를 배향하고 있다

그래서 두위(二位)만 배향한다고 그런지 편액은 이우사(憂祠)인듯 하다.

 

서원건물 하부구조

 

도천서원 묘정비와 충선공 선조묘소 봉심기념비(忠宣公 先祖墓所 奉審記念碑)

 

도천서원 전경

 

문익점 묘소 오르는 길

 

문익점 묘소 앞

 

충선공 문익점 묘소

 

문익점 묘소 석물(1)

 

(좌) 삼우당 문선생지묘(三憂堂 文先生之墓)  ,  (중앙)석등 

(우)삼우당 문선생지묘, 군부인 팔계주씨부(郡夫人 八溪周氏祔)

 

문익점 묘소 석물(2)

 

 (상) 문인석 좌.우     (하) 사자상 좌.우

 

문익점 묘소 측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