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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죽림 조수문의 담양 죽림재 홍매

by 안천 조각환 2024. 3. 17.

담양 죽림재(竹林齋)는 무등산에서 발원해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수남학구당, 관수정, 동강조대, 창평향교 등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품고

영산강으로 흐르며, 조선의 선비 문사들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했던

유서 깊은 증암천 옆 향백산 아래 고서면 분향리 잣정마을에 있다.

 

담양 죽림재 홍매

 

이곳 분향리 잣쟁이 마을은 창녕조씨(昌寧曹氏) 집성촌으로

원래 죽림재는 죽림(竹林) 조수문(曺秀文,1426∼?)이 건립한 정사(精舍)로서

대대로 창녕조씨 문중의 강학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처음 건물은 임진왜란시

귀중한 문서와 함께 소실되었고, 1623년(인조1)에 죽림의 6대손인

삼청당(三淸堂) 조부(曺簿)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죽림재 전경

 

그후 죽림과 그의 아들인 운곡(雲谷) 조호(曺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에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죽림재와 같은 위치로 죽림사(竹林祠)를 이건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복원되었다.

 

죽림재 입구

 

죽림 조수문은 어려서부터 강호 김숙자(江湖 金淑滋,1389~1456)의 문하에서

김숙자의 어들인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2)과 함께 학문을

수학한 뒤 죽림정사를 건립하여 후진교육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취사루(聚斯樓)와 장서각(藏書閣)

 

관련유적으로는 창녕조씨 문중의 취사당(聚斯堂 : 죽림사 강당),

세일재(歲一齋 : 조유도 묘각.曺由道 墓閣, 1899년 건립),

충효각(忠孝閣 : 조부의 효자 정려각,曺簿 孝子旌閭閣, 1640년 건립),

죽림사유허비(竹林祠遺墟碑), 조완정기실비(曺浣亭紀實碑),

증암수확수계원영사비(贈岩水確水契員永思碑) 등이 있다.

 

장서각 (藏書閣)

 

장서각(藏書閣)은 죽림 조수문 선생의 서적 보관고였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유허로 있다가 1972년에 정부 보조를 받아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정일도서관을 건립하여 학습장으로 활용하였다.
그 후 1987년 죽림재 일원이 문화재로 지정되자 현대식 구조물을 철거하고

198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취사루 건물앞의 석비

 

좌로부터 고려 문하시중 산광 조선생, 직제학 조선생 원향기실비(院享紀實碑), 

두 번째 증암수확계원영사비(甑巖水確禊員永思碑),

세 번째 세일재 중수실적비(歲一齋重修實績碑), 네 번째 서정조공기적비(墅亭曺公紀績碑),

다섯 번째는 조상호장관 덕업장앙비(曺相鎬長官德業獎仰碑)로 

대한체육회장과 체육부장관을 지낸 조상호장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취사루(聚斯樓)

 

취사루(聚斯樓)는 앞에서 보면  2층의 누각이지만 뒤에서는 단층건물이다.

이 건물은 문중의 후손들이 모여 공부하는 글방인 강당(講堂) 겸 숙소로 쓰였다.

죽림 조수문 사후 200년이 지나 죽림의 문하생과 후손들이 죽림의 학문과 도덕을

추모하는 사업이 활발해져 춘추 향사(享祀)때 참가객들이 많아 건립하였다고 한다.
1868(고종 5년) 서월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70년경 취사루를 중수하였다.

 

취사루앞 명옥대(鳴玉臺, 위 2024.3.17, 아래와 오른쪽 2024.4.12)

 

명옥대(鳴玉臺)는 삼청당(三淸堂) 조부(曺溥)가

죽림재를 재건하면서 유허로 있던 우물을 파서 부모에게 봉양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우물을 삼청정(三淸井)이라 명명하였지만 샘에서 솟는

물줄기가 구슬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 하여 명옥대라 바꿔 불렀다고 한다

 

죽림재(竹林齋)

 

죽림재를 처음 지은 조수문(曺秀文)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장보(章甫). 호(號)는 죽림(竹林)이며, 세조 무자년에 생원을 하였으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놓고

부모를 봉양하며, 성리학을 탐구, 강론하면서  면학으로 일생을 보냈다.

 

죽림재와 홍매

 

죽림재 편액은 고당 김규태(顧堂 金奎泰)의 글씨이다.

고당 김규태(1906~1966)는 전남 구례에서 활동했던 유학자이다.

 

 

죽림재는 조수문의 후손들과 유림들이 선생의 뜻을 살려 교육의 전당으로

운영하여 지방의 문학 진흥에 공헌하다가 정유재란(1597) 때 장서각,

문서 등과 함께 불에 타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6)에 죽림의 6세손

삼청당(三淸堂) 조부(曺溥)가 재건하였고, 이후 6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죽림재 측면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잠시 주둔하면서 한문학과 윤리교육은 퇴폐문학이요,

반혁명적 교육이라고 지적하면서 죽림재와 장서각에 소장된 문적을 불사르고,

또 조상의 누각을 지어 놓고 현판을 거는 행위는 족벌체제의 잔재이며

종파분자의 반동적 소행이라면서 현판을 뜯어내는 등 행패를 부렸다.

현재의 현판은 당시 숨겨 놓았던 것을 다시 걸어놓은 것이다.

 

죽림재 마루

 

죽림재는 창녕 조씨 문중의 글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수련장이었다.

 

죽림재앞 홍매 두그루

 

수형과 생육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인데, 아직은 일러서 일부만 피었는데

3월말쯤 되면 짙은 분홍색으로 곱게 만개할것 같다

 

뒤에서 본 죽림재

 

죽림사 사당  신문(神門)인 앙지문(仰止門)

 

죽림사(林祠)는 죽림재 바로 뒤에 있으며,

  죽림 조수문선생의 아들인 운곡 조호(雲谷 曺 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에 문인과 후손에 의해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에 죽림재 뒷편으로  죽림사를 이건하였다.

 

죽림사(竹林祠)

 

1868년 고종 5년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에 복원되었으며

사당에는 고려조 문하시중을 지낸 산광 조대운, 담양 입향조인 직제학 조유도,

조선초 호남유학을 뿌리 내린 죽림 조수문과 그의 아들 운곡 조호,

수남학구당 창건 일등공신 환학당 조여심, 병자호란때 의병을 봉기한

삼청당 조부, 죽림서원 중창을 도운 송강 정철의 5대손 소은 정민하 선생 등

7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15일에 지역유림과

창녕조씨 밀직사공파 후손들이 춘계향사를 올리고 있다.

 

*이중 소은(簫隱) 정민하(鄭敏河)는 송강 정철의 3남 정진명(鄭振溟)의 4세손으로 

타인의 손에 넘어갔던 계당(溪堂)과, 식영정(息影亭)을 인수하였던 분이다.

 

죽림사 앞마당의 "창령조씨 삼선생 서원유허비(昌寧曺氏 三先生 書院 遺墟碑 )

 

죽림사에 배향된 창녕조씨 3위에 대한 유허비다

 

죽림사에서 본 홍매와 취사루

 

세일재와 취사루, 동재,서재 전경

 

세일재(歲一齋)는 창녕 조씨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의 담양(창평) 입향조인

려 보문각 직제학 조유도(曺由道)를 배향한 사당인 영모당(永慕堂)으로

 1899년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세일재(歲一齋)

 

조유도는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 때 고려 충신 정포은(鄭圃隱)이

억울하게 모함 당했음을 항의, 상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은의 충절과 정치

노선을 지지 찬양하였다가 조정에서 미움을 받아 담양 창평으로 유배되었다.

여생을 이곳 고서면 분향리(분토동)에서 마쳤으며 묘소도 현 분토동에 위치하고 있다.
1890년에 동·서재와 같이 건립하여 현판을 세일재(歲一齋)로 걸었으며

그 앞에 직제학 조유도(曺由道)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곳에는 입향조 이하 81위의 조상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세일재 동재인 육영당(育榮堂)

 

서재인 정일재(精一齋)

 

세일재에서 본 단층의 취사루(聚斯樓,당,堂)

 

취사루 안에서(2024.4.12)

 

취사루 편액(2024.4.12)

 

세일재앞의 조유도(曺由道)선생 신도비

 

취사루옆 전사청(奠祀廳)

 

춘추향사 때 사용하는 제사 기물을 보관하고 제수를 준비하는 곳

 

측면에서 보는 세일재와 취사루, 전사청 건물

 

옛 비석 받침대

 

충효각(忠孝閣) 전경

 

충효문

 

충효각(忠孝閣)은 효자 삼청당(三淸堂) 조부(曺溥)를 기린 상징물이다.
조부(曺溥)는 병자호란 때 상중(喪中)의 몸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하려고 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적인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지 못함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충효정려(忠孝旌閭) 각

 

이러한 그의 애국 충정의 행동을 본 유림 안처공(安處恭) 외 90여 인이

그 충효 겸절에 크게 감화되어 조정에 그의 충정을 널리 드러내줄 것을 건의하자

1604년(인조 18년) 정려를 하명 받아 설립하였다.

 

충효정려각과 효자정려 편액(위 :2024.3.17, 아래 2024.4.12)

 

효자선무랑 행 제릉참봉 조부지각(孝子宣務郞 行 齊陵參奉 曺溥之閣)

 

장서각과 취사루 일원

 

죽림재에서는 이곳 담양(창평) 입향조인 조유도(曺由道)선생의 후손들이,

조유도선생의 조부이신 려 보문각 직제학 밀직사 조준(曺濬)선생을

밀직사공파(密直司公派) 파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죽림재앞 잣정마을(분향리, 2024.4.12)

 

밀직사공파의 파조인 밀직사 조준(曺濬)선생은 창녕조씨 갱기(更起) 1세인

조송무(曺松茂)의 7세손(시조 조계룡,曺繼龍의 27세손)으로  

맏아들인 2세손 조전(曺錢), 7세손 조준(曺濬), 8세손 조대운(曺大運), 

9세손 조유도, 10세손 조수문(曺秀文)으로 이어지는 창녕조문의 종손이며, 

현재는 조수문의 둘째 아들인 조순(曺洵,11세손), 조순의  둘째 아들이며

즉 조수문의 손자인 조여심(曺汝諶) 등 종손들이 죽림재를 이어오고 있다.

 

"창녕조씨문중"이라 쓰인 표지판과 죽림재 전경

 

밀직사공파 가계를 잠시 살펴보면 갱기 8세(28세) 산광 조대운(1328~1398)은

포은 정몽주와 함께 학문하고 왕도정치,경자유전 등 개혁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역성혁명 이후엔 두문동에 은거했다.

그는 두문동 충신들과 함께 순절한 72현 중 한사람으로 두문동서원과

장성 경현사, 담양 죽림사(전라남도기념물 제99호)에 배향됐다.

 

죽림 조수문의 창녕조문(족보) 가계도.

 

갱기 9세(시조의 29세) 조유도(1367~1450)는 고려말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고

선죽교 피습사건에 관한 상소로 인해 창평에 유배돼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고려에 절개를 지킨 항절신으로 부친과 함께 두문동서원 등에 배향됐다.

 

그의 아들 조수문(曺秀文,1426~1494, 호는 죽림)은 경서와 사서에

정통해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탐구에 전념하며

죽림재를 세워 소세양(좌찬성), 윤달신(판서), 조호(부제학) 등을 배출했다.

이외에도 갱기 10세 조호(1450~1517, 호는 운곡)는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

사간원사서,호조정랑,사헌부집의,홍문관교리를 거쳐 홍주,공주목사를 역임하고

연산군 때 낙향해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동리입구의 관수정(수선중) ~ 조수문의 손자 조여심(1518~1594)이 세움

 

갱기 12세(시조의 32세) 조여충(1491~1573, 호는 계월당)과 그의 사촌 동생인

조여심(1518~1594, 호는 환학당), 갱기13세(33세) 조국경(1519~1587, 호는 남촌)

갱기16세(36세) 조부(1593~1656, 삼청당) 등은 학덕이 뛰어났으며,

갱기24세(44세) 조은환(1865~1945)은 창녕조씨 시조묘소 재각인 종덕재 재장을

역임했으며, 종가에서는 죽림서원(죽림재,죽림사,서일재,취사루,정일재,육영당),

충효정려, 관수정, 고문서 등 선조의 유적을 보존하며 학덕 계승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