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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부산.울산.경남권

합천 화양리 박소의 묘(100대 명당)와 신도비

by 안천 조각환 2024. 6. 8.

 야천 박소 신도비 합천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비석이다.

 야천(冶川) 박소(朴紹,1483~1534)는 중종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이다.

행직(行職)은 사간원 사간(司諫)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신도비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90년(선조 23)에 건립하였다.

 

야천 박소 신도비와 비각

 

야천 박소선생은 1493년(성종 24) 서울에서 출생하여

1519년(중종 14) 대과에 장원급제한 후,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고

이때 정유삼흉(丁酉三兇)으로 불리는 김안로채무택, 허항 훈구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외가(외조부 단성현감 윤자선,파평윤씨)가 있는

경남 합천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이곳에서 타계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야천(冶川) 박소(朴紹,1483~1534)의 신도비(神道碑)

 

신도비의 비문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이 짓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을 써서 1590년(선조 23)에 세웠다. 

신도비의 높이는 210㎝, 너비 90㎝, 두께 30㎝이며,

그의 묘에서 솔숲사이로 바로 보이는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조선 중기 사대부의 신도비로, 금석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비각은 1993년 반남박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신도비 측면

 

박소는 합천으로 내려와 5년뒤 타계하였는데, 부인 홍씨는

남편 박소와 절친했던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1485-1551)에게 부탁,

그가 잡아준 묘터(박동량의 기재잡기 참조)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19세 ~ 2) 5남 2녀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친정 아버지 홍사부의 도움으로 자식들을 좋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게하여 두명은 장원급제하고 세명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신도비각(뒷면)

 

박소의 아버지는 이조 정랑(正郞) 박조년(朴兆年)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현감(縣監)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 박임종(朴林宗)이며, 선조(宣祖)의

국구(國舅,장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아버지고,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조부가 된다.

 

밤꽃피는 6월에

 

합천 화양리 야천 박소 3대 묘역

 

위에서 부터 문강공 박소, 아들 감정공 박응천,

손자 활당공 벅동현까지 박소의 종손(宗孫) 3대가 묻혀 있는곳이다.

이곳은 한국풍수지리학회에서 선정한 100대 명당자리 중 하나로

풍수지리 연구가들의 필수 탐방코스 중 하나이다.

 

야천 박소의 묘

 

박소의 아들 5형제중 두명은 장원급제하고, 세명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특히 둘째 박응순의 딸은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가 되므로써 선조의 국구(國舅, 장인)가 되었다.

 

박소의 묘비(중간)와  정부인 남양홍씨 묘비명(오른쪽)

 

세째 박응복은 대사헌을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 박동량(형조판서)과

박세채(좌의정), 박세당(이조판서), 박미(부마)등의 인물이 나왔다.

 

박소의 묘비(앞.뒤)

 

 묘비의 앞면은 박소의 벼슬 직위 등이 있는 묘비명이고,

뒷면은 박소의 부인인 남양홍씨의 이장 내력이 새겨져 있다.

홍씨부인은 85세에 타계하여 남양주시 일패동 언덕에 묻혔다가

그곳에 명성황후의 홍릉을 조성하게 됨으로서 장남 박응천과 함께

1900년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은 박소와 합장하고

장남 박응천은 박소 묘 아래에 이장하였다

 

정부인 남양홍씨 묘비명(貞夫人 南陽洪氏 墓碑銘)

 

야천 박소의 묘를 이곳에 쓰게된 일화가 오창공 박동량의

"기재잡기" 중에 있는 야천(冶川)의 묘 편에 전해져 온다.

 

야천 선생이 임종을 짐작하고 홍씨부인에게 말하기를

"절친인 생원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 1485-1551)에게

사람을 보내 임종을 알리고 묘자리를 잡도록 부탁하라고 하였다." 

소식을 접한 이생원이 달려와 묘탑을 잡아놓고 내려와 통곡하였다.

 

박소의 묘 옆 향나무(수령이 300여 년 이상 되었을듯)

 

장사는 유월장(6개월후 장사하는 유교 장의법)으로 정일하였으며

이곳은 후손 중 고관대작이 나고 관료가 이어진다.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유월 장기 중 외가에 초상이 나자, 파평윤씨가 이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자, 외가의 도움으로 살아가던 처지라

난감하여, 홍씨부인이 이생원에게 전하니, 이생원은 그런 묘탑은

다시 구할 수 없다.고 하며, 묘책을 홍씨부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 묘책이란 "일단 묘탑을 양보해 주고 장사일 전날 밤에

파 놓은 묘탑 관구자리에 물을 퍼다 붓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윤씨가에서는 장사준비를 마치고, 장사 당일 행상을 차려

산에 도착하여 파 놓은 묘탑 관구자리를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를 본 윤 씨는 “이생원도 별 수 없구만” 하며 행상을 돌렸다고 한다.

그 후 홍씨부인은 유월장기 후 야천선생의 분묘를 그 자리에 썼다.

 

박소의 묘에서 송림사이로 보이는 박소의 신도비

 

박소의 묘  아래에 있는 아들, 손자 묘, 그리고 화양재(재실)

 

아들인 감정공 박응천의 묘

 

박응천(朴應川, ?~1581)은 조선전기에 태인현감, 봉산군수,

한성부서윤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혼중(渾仲).

할아버지는 이조정랑 박조년(朴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손자 활당공 벅동현의 묘(바로 위는 박응천의 묘)

 

박동현(朴東賢,1544~1594)은 의금부도사, 종부시직장, 석성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학기(學起), 호는 활당(活塘).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이다. 

 

묘역 바로 아래에 있는 화양재(재실)

 

화양재 전경

 

반남박씨의 시조는 고려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다.

문강공 박소의 10대조인 판전교신사 박상충(朴尙衷)이 3남을 두었는데,

 그중 2남 박은(朴訔)이 조선 태종과 의기투합하여 두차례의 왕자난에

공을 세우고 좌의정 겸 판리조서를 역임하고 반남군(潘南君)

봉해졌는데, 이를 계기로 반남을 본관으로 삼았다. 

박소(朴紹)는 박은(朴訔)의 6세손이다.

 

화양재 정문

 

반남박씨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정승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

(선조 비 의인왕후, 인종 비 인성왕후),후궁 1명(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문과 급제자 215명, 무과 급제자 23명, 의과 1명, 음관 176명, 상신(정승) 7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장신 3명, 호당(부마) 5명, 사마시 422명을

배출하는 등 조선시대에 국반(國班)의 대열에 등극한 가문이다.

 

화양재(華陽齋)

 

화양재는 야천 박소의 반남박씨 재실로 1793(정조17)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