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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경산 관란서원과 조곡서원

by 안천 조각환 2024. 6. 16.

관란서원(觀瀾書院)은 경산 용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서원으로

1660년(현종 1) 이언적(李彦迪)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조곡서원(早谷書院) 경산 남산면에 있으며, 정조 18년(1794)에

안우(安祐)와 안지(安止)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1.관란서원(觀瀾書院)

경산 관란서원(觀瀾書院) 전경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도덕과 학문을 추앙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한 관란서원은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유생들의

학문을 닦는 곳으로만 사용되어 오다가 최근세에 일부 복원하였다.

 

관란서원 입구

 

경내의 건물로는 강당(3칸),고사(2동 5칸),대문(1칸) 등이 있다.

강당은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었다.

고사의 1동은 향례 때에 제수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며,

또 1동은 제구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관란서원과 사당의 사잇문

 

경내에는 이언적의 단비(壇碑)가 건립되어 있다.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관란서원(觀瀾書院) 편액

 

강학당

 

좌우의 수많은 편액들

 

앞,뒤 마당을 꽉채운 개망초꽃

 

사당 출입문 

 

안인사(安仁祠)

 

사당쪽에서 본 관란서원 담장과 건물

 

관란서원 측면

 

문원공 회재선생 단비(文元公 晦齋先生 壇碑)

 

2. 조곡서원(早谷書院)

경산 조곡서원(早谷書院)

 

조곡서원은 자인면의 유림과 탐진 안씨 후손이 그 선조인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1362)와 그 4세손인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1384~1464)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정문

 

정조 22년(1798)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이듬해

지금 자리에 교육 공간인 상경재(尙敬齋)가 다시 지어졌다.

1900년에는 상경재 뒤에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지어졌다.

 

정문입구의 경(敬)석

 

안우(安祐,?~1362)는 고려 공민왕 때 도원수(都元帥)로서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고려사에 의하면

안우(安祐) 장군은 1354년 6월에 오성군(鼇城君)에 봉해졌는데,

 그의 출신지 탐진현(耽津縣)의 별호가 오산(鼇山)이기 때문이다. 

1452년(문종 2) 경기 연천의 고려 종묘인 숭의전(崇義殿)에 모셔졌다.

 

정문인 향도문(嚮道門)

 

안지(安止,1384~1464)의  본관은 탐진(耽津: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 아버지는 찬성 안사종(安士宗)이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修撰),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으며,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담장 너머로 보는 조곡서원 현판

 

1455년(세조 1)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세조가 즉위한 뒤 관작을 주었다.

그 때 안지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충현사(忠賢祠,사당) 뒤에서 보는 조곡서원

 

경산 조곡서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