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대율리 한밤마을은 고려 중기 시중을 지낸 부림홍씨 입향조인
홍란(洪鸞)이 이주해 오면서 대식(大食) 또는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이 후 고려말 경재(敬齋) 홍노(洪魯)선생이 낙향하여 대야(大夜)를
대율(大栗)로 고쳐 부르면서 대율리 즉 한밤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한밤마을 송림과 돌담
한밤마을의 돌담은 마을이 형성되면서 집을 지을 터를 닦을 때,
땅에서 파낸 많은 돌들을 처리하기 위해 그 돌로 땅의 경계를
삼은것이 돌담의 시초이며, 지금은 마을의 상징처럼 되었다.
양산서원(陽山書院) 입구
양산서원(陽山書院)은 군위 부계면 한밤마을에 있는 서원이다.
이 고을은 부림홍씨의 세거지로, 고려 말기 충신 문하사인(門下舍人)
홍노(洪魯)선생과 조선 초의 문신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 홍귀달(洪貴達),
이조좌랑을 역임한 홍언충(洪彦忠)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건립하여 세 선생의 영위를 봉안하였다.
양산서원 전경
양산서원에는 묘우인 숭덕사를 비롯해 교육공간인 흥교당(興敎堂),
기숙공간인 구인재(求仁齋), 입나재(立懦齋) , 문루인 읍청루(挹淸樓),
반무당, 그외 전사청과 부속 건축물 등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됐다.
읍청루(挹淸樓) ~ 서원 정문
이후 1897년(광무1) 강당을 중건하고 1989년 다시 수리하였다.
강당 뒤쪽에 건립한 장판각에는 홍노(洪魯)의 "경재선생실기" 목판과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홍여하가 수찬한 "휘찬려사"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그동안 양산서당으로 존속되어 오다가
2015년 정부의 지원으로 대부분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읍청루 측면
서원을 복원하면서 처음의 세분 위패(位牌)를 환안(還安)함과 동시
휘찬려사(彙纂麗史)를 저술한 홍여하(洪汝河)와 돈녕부도정
(敦寧府都正)을 지낸 홍택하(洪宅夏) 두분 신위를 추가 배향하였다.
읍청루 누대
강당인 흥교당(興敎堂)과 동.서재
경재(敬齋) 홍노(洪魯,1366~1392)선생의 본관은 부림(缶林, 缶溪),
자는 득지(得之), 호는 경재(敬齋)이다.
1387년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때인 1390년 대과에 급제하였다.
포은 정몽주의 추천으로 한림학사가 되고, 이어 문하사인으로 승진되었다.
양산서원(陽山書院) 강당
그러나 이때는 고려의 운세가 쇠하여 극히 혼란스러운 시기인지라
경재(敬齋)는 병을 핑게로 사임하고 부계로 낙향하여 부모봉양과,
서재에는 경재(敬齋)라는 편액을 걸고 선비의 본업에만 전념했다.
강당인 흥교당 대청
숭덕사(崇德祠,사당) 내삼문(신문,神門)인 일성문(日省門)
1392년 음력 7월 17일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리던 그날 새벽, 경재(敬齋)는 신여국계망(臣與國階亡) 사역하언(死易何言)
즉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나이다. 죽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 라는 말만 남기고 2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
숭덕사(사당)에는 홍노(洪魯,1366~1392), 홍귀달(洪貴達,1438~1504),
홍언충(洪彦忠,1473~1508,홍귀달의 자), 홍여하(洪汝河,1620~1674),
홍택하(洪宅夏,1752~1820) 다섯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창판각 옛터(강당인 흥교당 뒤) 표석
장판각에는 "경재선생실기" 목판과 "휘찬려사"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11년 한국국학진흥원(안동 소재)에 위탁 보관하였다.
전사청(典祀廳)과 부속건물
양산서원 측면에서
부림 홍씨(缶林=缶溪 洪氏)는 홍란(洪鸞)을 시조로 하고
고려 중엽 직장(直長)을 지낸 홍좌(洪佐)를 기세조(1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홍노(洪魯,1366~1392)는 홍좌의 9세손,
홍귀달(洪貴達,1438~1504)은 홍좌의 10세손이다.
척서정(陟西亭)
척서정은 양산서원의 전신인 용재서원(湧才書院)이 훼철되자
경재 선생 유허지에 척서정을 세워 선생의 충절을 기렸던 곳이다.
양산폭포와 척서정
척서(陟西)란 백이.숙재가 은거한 수양산의 별칭이 서산이며
그들이 지은 채미가(采薇歌)에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자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라는 시 구절을 취해 오를 등(登)자 대신
오를 척(陟)자를 넣어 척서정이라 했다 한다.
척서정 풍광
척서정앞의 양산폭포와 계류
경재(敬齋) 홍노(洪魯)선생의 시비
회포를 쓰다 / 사회(寫懷)
경재(敬齋) 홍노(洪魯,1366~1392)
일생동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다 기울여
임금과 백성에게 은택을 이룰 포부가 깊었노라.
모든 일이 이제와 품은 뜻과는 어긋나니
차라리 초야로 돌아가 운림에 숨어 살리라.
평생충의온제심(平生忠義蘊諸心)
치택군민포부심(致澤君民抱負深)
만사우금위숙계(萬事于今違宿計)
불여귀거와운림(不如歸去臥雲林)
한밤마을의 비보림인 송림
홍귀달(洪貴達, 1438~1504)선생은 홍좌(洪佐)의 10세손으로,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이다.
조선전기 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名鑑)을 편찬하였다.
진동단(鎭洞檀)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원통함을 풀어버림,복권)되었으며,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군위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관찰사 홍상국 휘훈영 영세불망비(觀察使 洪相國 諱坃永 永世不忘碑)
효자 부림홍공 영섭지비(孝子 缶林洪公 永夑之碑)
이 두 석비는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했을 때 의병을 조직하고
이곳에서 훈련하여 왜군의 주요 보급로 거점인 영천성을 수복하는데
선봉장 역할을 한 송강 홍천뢰 장군과, 군량조달과 작전까지 수행하여
전공을 세운 혼암 홍경승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송강 홍천뢰장군 추모비(松岡 洪天賚將軍 追慕碑)
선무원종공신 혼암 부림홍공 휘경승선생 기적비
(宣武原從功臣 混庵 缶林洪公 諱慶承先生 紀跡碑)
효부 풍천임여사 기념비(孝婦 豊川任女士 紀念碑)
마을앞 느티나무(보호수)
대청(大廳) ~ 대율동중서당(大栗洞中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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